사람이 좋아서, 예술이 좋아서 찾아드는 마을, 월선리
사람이 좋아서, 예술이 좋아서 찾아드는 마을, 월선리
月仙里, 시골 마을 이름 치고는 참으로 서정적이다. 달빛 속 신선이라는 이름 그대로 월선리는 雲中囚月의 명당터란다. 정성스레 밥을 지어준 초부에게 도선대사는 세 곳의 천하 명당터를 일러주었다. 선녀가 승천하다가 반지를 떨어트린 金丸落地, 금두꺼비가 진흙 속으로 기어들어 가는 金龜沒泥, 구름으로 달빛을 가두고 그 빛으로 신선들이 책을 읽는 雲中囚月이 그것이었다. 구례 토지면의 운조루 자리와 그 앞 일대가가 금환낙지와 금구몰니의 명당이요 이 곳 무안군 청계면 월선리가 운중수월의 명당터라고 한다.
아내가 월선리 구경을 가자고 했다. 월선리를 찾아간다. 텔레비전이나 책에서 한두 번 월선리 예술인촌 이야기를 보고 읽은 기억은 있지마는 정확한 위치도 찾아가는 길도 모른다. 무안군 홈페이지에 들어가 봐도 월선리에 관한 정보는 없었다. 최근에 집어온 남도 여행 책에서 찾아낸 한 줄(광목간 도로변의 장부다리 휴게소에서 일로 방면으로 1.5키로 정도 가다 보면 승달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만 믿고 길을 나선다. 광목간 1번 국도는 1번이라는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운전하기는 별로 재미없는 길이다. 차는 많고. 별로 볼 것도 없고...
언제나 그렇듯 모르고 찾아가는 길은 참으로 멀게 느껴진다. 슬슬 내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낼 때쯤 ‘월선리 예술촌’이라는 표지판을 만났다. 마을로 들어선다. 이렇다 눈에 띄는 것이 없는 평범한 시골마을이다. 논 하나를 밀어 마련한 큼직한 주차장이 좀 별나다면 별날까...
월선리 예술촌은 16년전 지금의 촌장인 도예가 김 문호 선생이 이 마을에 찾아들면서 시작되었다. 그들 따라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 지금은 15명의 예술인들이 이곳에 둥지를 틀고 있다. 도예가, 화가, 국악인, 소설가, 조각가 등 그 분야도 다양하다. 올해 안으로 3명 정도가 더 들어올 예정이라고 한다. 들어오고 싶어 하는 사람은 적지 않은데 집이 없어 못 들어온다고 한다. 무안군내에서도 유일하게 인구가 늘고 있는 마을이다. 우리가 찾아갔을 때도 목공예가와 조각가의 작업실을 짓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보통 예술인촌은 예술가들이 모여 자기들만의 울타리를 짓고 원주민들과는 배타적으로 지내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이곳은 이 마을에 예술가들이 하나 둘씩 찾아 들어 함께 어울려 사는 부락 공동체다. 그들만의 예술이거나 그들만의 예술인이 아니라 원주민들과 함께하는 예술, 주민들 속의 예술가를 지향한다. 분청사기축제, 주말 콘써트, 승광다혜, 예술체험 캠프... 관청에 손 벌리지 않고도 이런 일들을 거뜬히 꾸려갈 수 있는 자생력의 원천은 바고 그 주민과 함께하는 예술인 것이다.
차를 세우고 나지막한 구릉에 엎드린 마을 쪽으로 걸어 올라가자 나타나는 정자며 황토집이 ‘여기가 예술인촌이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했다. 비가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군데 군데 물이 고인 골목길. 질퍽질퍽한 황토길... 아는 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이 골목 저 골목을 어슬렁 거리고 다니면서 마을을 돌아본다. 털어도 신발에 자꾸만 달라붙는 흙덩어리들... 첫인상은 어설프고 황량했다.
<윤도예방>, <월선서당>이라는 표지판을 보고 접어든 골목은 몹시도 좁았다. 시골 마을이건만 도회지의 빈민촌처럼 골목은 좁고 다닥다닥 붙은 집들도 시골마을 답지 않게 작고 답답했다. 시멘트를 바른 마을길, 시멘트가 발리지 않은 곳은 빗물에 흙이 쓸려 내려가 돌멩이들이 이리저리 뒹굴고 있었다. 마구 버려진 쓰레기, 쓰레기 처럼 버려진 폐가... 하얗게 쏟아지는 햇살이 아니었으면 꽤나 마음이 수수했을 것이다.
그 골목이 끝나는 맨 꼭대기에 서당이 있었다. 훈장님은 어디로 출타중이고 손바닥만 사립문은 단정히 닫겨 있었다. 그런데 그 서당이 몹시도 내 눈길을 끌었다. 정말 작은 집이었다. 지금은 비록 머리에는 스레트를 이고 양쪽에 작은 방 하나씩 날개를 달아 5간 집이 되었지만 원래는 말 그대로 초가삼간이었으리라. 대지 전체가 한 스물 서너 평이나 될까? 그 손바닥만 터에 앉은 장난감 같은 집, 그래도 뒤 안에는 밭두렁에 기대 앉힌 조그만 원두막 같은 초정도 있었다. 둘이 앉으면 무릎이 닿을 듯 작았다. 손바닥만한 마당에는 그래도 작약 등 몇 종류의 꽃이 피어 있었고 개나리 한두 그루로 만들어 놓은 생울타리도 참으로 앙증맞았다. 손바닥 두장 펼쳐 놓으면 온전히 가릴 수 있을 것 같은 사립문에는 손톱만한 초인종도 달려있었다. 김 수근이 말한 휴먼 스케일의 집, 집이 아니라 주인을 크게 그리고 돋보이게 하는 집이었다.
나중에 김 문호 샘께 들으니 원래 공짜로 와서 살라는 집이었단다. 그래도 남의 집을 어떻게 공짜로 사느냐고 했더니 그러면 삼십만 원만 내라고 해서 산 삼십만 원 짜리 집이란다. 그 훈장님이 재주꾼인지라 직접 고치고 달아내고... 해서 지금의 그 앙증맞게 아름다운 집을 만들었단다. 모든 게 작았지만 그래도 있을 것은 다 있는 결코 작지 않은 집. 마루에는 주인이 늘 온지 2년 7개월 밖에 안돼서 아직 풍월을 읊지 못한다는 서당 개가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공부를 많이 한 개여서 그런지 낯선 사람의 인기척에도 고개를 들어 한번 바라보고는 다시 고개를 마루에 붙이고 원래 자세로 돌아갔다. 개가 누워있는 뒷 쪽 흙벽에는 주인이 써 붙인 堂狗三年吟風月이란 글귀가 서당 개와 묘한 대조를 보여주고 있었다. <월선서당>이라는 현판만은 집에 비해서 우람하다할 만큼 크고 당당했다.
그 골목을 되짚어서 내려오다 보니 골목 초입에 <윤도예방>이 있었다. 대문이 굳게 닫혀 있는 지라 까치발을 하고 담 너머로 집을 들여다본다. 깨끗하게 수리를 한 본래의 농가가 있고 그 마당 한 구석에 황토로 작업실을 새로 앉혔다. 아담한 마당 한 켠으로는 꽃밭과 텃밭이 있었고 마당에는 곱게 양잔디가 깔려 있었다. 반지르르 윤이 나는 마루가 고와 보였다. 담 너머로 집안을 흘끔거리고 있는데 안에서 “누구세요?”라는 주인의 목소리가 담을 넘어 온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더니 안에 사람이 있었나 보다. 순간 도둑고양이처럼 남의 집을 흘끔 거린게 부끄럽고 무안해 진다.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대문 밖으로 달덩어리 같은 주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밖에서 점심 약속이 있어 곧 나가 봐야 하지만 별로 볼 것은 없지만... 잠간 들어와서 보란다.
모든 것이 작고 예뻤다. 월선서당 보다는 덜하지만 참으로 알뜰하게 공간을 쓰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옛집 처마에 붙은 제비집에는 제비가 드나들고 있었다. 제비 집과는 약간 떨어진 곳 마루에 놓인 얇은 판자 위에 제비 똥이 가득하다. 그 판자에 ‘제비 화장실’라고 쓰여 있었다. 이 집의 제비는 글을 읽을 줄 아는 모양이라고 찾아오는 이 마다 감탄을 한단다.
반지르르 윤이 나는 툇마루를 올라 들어간 다실. 제법 널찍한 공간이지만 그의 분청사기와 고가구들로 방안 분위기는 차분하다. 이 마을에 들어온 이야기에서 집 고치면서 고생하던 이야기로, 분청예찬으로 끝없이 이어진다. 처음 만났는데도 전혀 처음 만난 사람 같지가 않다. 대문 밖 까지 따라와 꼭 다시 오라는 안주인의 검정 고무신이 정말 이뻤다.
밥 때가 훌쩍 지나 배도 고프다. 승광요 골목을 걸어 나오는데 뒤에서 누가 부른다. 돌아보니 한 남자가 “차 한잔 하고 가세요” 얼굴 가득 웃음 띈 표정으로 승광요 사립문을 가리킨다. 이 마을 촌장, 김 문호 선생이었다. 그 도자기 작업장 한 켠에서 또 차를 얻어 마신다. 바닥은 맨봉당이다. 어렸을 적에 내가 살던 고향집의 정제도 이런 맨봉당이었다. 이 집은 철두철미하게 황토와 나무만으로 땅이 생긴 모양대로 집을 앉혔다.
우리가 차를 마시는 탁자 한 켠에는 고양이가 맛있게 낮잠을 자고 있었다. 얼굴을 만지거나 다리를 들어도 눈만 뜨고 멀건히 보다가는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잔다. 난로 가에도 흙 묻은 고양이 한 마리가 낮잠을 자고 있었다. 모든 것이 나른하고 평화로운 오후였다.
처음 이 마을에 들어와 고생한 이야기에다 예술촌과 자생력, 유년기의 추억과 체험, 관 주도의 축제의 문제점, 여름방학 예술체험캠프 등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고갔다. 그의 집 처마 밑에는 <복사 꽃 피인 집>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었다. 그의 복숭아 나무 예찬론이 이어졌다. 복사꽃 피는 마을을 만들기 위해 복숭아 나무를 열심히 심었지만 농약으로 힘을 잃은 해충들이 복숭아를 먹고 다시 생기를 찾는다고 동네 사람들이 뽑아버렸단다. 복사꽃 피는 마을의 꿈은 아직은 먼 듯이 보였다. 운중수월의 명당이라고는 하나 나 같은 범인의 눈에는 그저 보통 시골 마을일 뿐. 자연 풍광이 빼어난 것도 아니고 언뜻 봐서는 이렇다 눈에 띄는 볼거리가 별로 없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것은 당연하다. 월선리 예술촌은 뭘 보기 위해 찾아오는 마을이 아니라 그들은 사람이 좋아서, 예술(문화)가 좋아서 그 사람과 문화(예술)를 만나러 찾아오는 마을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윤도예방의 윤 숙정 선생의 말처럼 ‘사람이 좋아서 찾아오는 집이고 마을이어야 한다.’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 집이나 마을은 쇼룸에 지나지 않는다. 꽃 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돈 냄새가 아니라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월선리 예술인촌이었다.
동물들이 상처를 입으면 토굴에 들어가 자연치유를 위해 한달이고 두달이고 은거한다. 그 기간을 통해 동물들은 타고난 면역력으로 자생력을 기른다. 월선리 예술촌은 예술인들을 위한 마을이 아니다. 오히려 도시에서 지치고 힘든 사람들을 위한 토굴과 같은 공간이다.(소설가 김 대호) 매주 토요일 마다 열리는 마을 노천 극장에서의 주말 콘써트나 매주 금요일 오후의 승광다혜는 도회인과의 소통을 위한 이 곳 사람들의 작은 문화실천이다. 이곳에 들러서 세상에서 상처 입은 마음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고 갔으면 하는 마음을 가진 예술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 월선리 예술인 마을은 한마디로 우리 시대의 處士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