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변정담(爐邊情談)

아내의 과거가 내게 꼬리 밟힌 날....

소한재 2005. 11. 15. 02:09

아내가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학 다닐 때 하회탈춤연구회에서 활동한 적이 있는데 그 때 하회탈과 관련된 문화영화에 허도령을 사모하는 동네 처녀 역으로 출연했다는 것이다. 국립영화제작소 제작팀이 내려와 하회마을과 안동 임청각에서 촬영을 했는데 출연료를 받아서 동아리 단원들이 거나하게 회식을 했다는 것이다. 촬영만 했을 뿐, 어떻게 나왔는지 본인도 한번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래 전 일이기도 하고 아무도 본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확인할 수도 없으니 그저 나에게는 까마득한 날의 전설일 뿐이었다. 아내는 그 영화제목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내 본인으로서는 좋은 추억거리가 될 듯도 하고 나로서도 아내의 그 때 모습이 어떠했는지 궁금하기도 하여 국립영화제작소에 전화를 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찾기도 어려울 것 같고 설령 찾는다해도 그걸 무슨 재주로 볼 수 있을 것인가하는 생각에 마음을 접고 말았다.

 

얼마 전에 아내가 박정희 전대통령이 가족모임에서 고복수의 <짝사랑>을 부르는 동영상이 요즈음 인터넷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기사를 보여주었다. 국립영화제작소 홈페이지에서 그 동영상을 찾아내 30년 전 그 때 그 시절을 추억하면서 함께 보았다. 속담에 떡 본 김에 제사지낸다고 국립영화제작소 홈페이지에 들어온 김에 한번 검색을 해보았는데 의외로 쉽게 아내가 출연한 영화를 찾아냈다.

 

제목은 <하회탈춤>이고 이 광수 감독이 1980년에 제작한 27분짜리 35미리 칼러 필름이었다. 하회탈 제작에 얽힌 전설과 강신제에서 신방마당에 이르기 까지 하회별신굿놀이 전과정을 소개하는 문화영화였다. 나는 대학 다닐 때 하회별신굿에 관한 논문을 무려 여섯편이나 쓸 계획으로 하회마을을 뻔질나게 드나든 추억이 있는데 아내는 그 때 하회가면극 연구회에서 하회탈춤을 추고 있었다니...

 

하회탈춤(탈놀음)은 하회마을의 서낭신제의 제의과정으로 행해지는 것인데 그 탈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하회마을은 지금의 하회 유씨들이 살기 이전에는 허씨들이 살았다. 허씨들이 그 마을에 살 때 허씨 성을 가진 한 도령이 현몽한 신으로 부터 서낭신제에 쓸 탈 10개를 백일 안에 제작하도록 명을 받는다. 신탁을 받은 허도령이 금줄을 치고 탈 제작에 들어가는데 그 마을에는 허도령을 사모하는 동네 처녀가 하나 있었다. 그런 전설이 무슨 공식 처럼 모두 그렇듯 그 처녀는 너무나 보고 싶은 마음에 99일째 되는 날 그 몇시간을 참지 못하고 몰래 들여다 보게되는데... 그 때 마지막 이메날 턱 부분을 깍고 있던 허도령은 피를 토하고 죽고 만다. 그런 사연 때문에 지금도 이메탈은 턱이 없는 채로 전해온다.

 

한 씬 두 세 커트에 불과하지마는 24년전 아내가 출연했던 영화를 찾아낸 것은 나로서는 역사적 발굴이요 위대한 발견이었다. 우리 집에서 그 것은 일대 사건이었다. 영화 속에서 아내는 스물 한 살 꽃다운 처녀의 모습으로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스물 한살, 그 때 그 시절로 돌아간 듯 아내도 우리 아이들도 신기해 하고 자랑스러워했다.

 

얼마전에 옥션을 통해 사진 액자를 샀다. 크고 작은 액자를 네개가 한 세트인데 비교적 가격이 싸길래 충동구매 비슷하게 사고 말았다. 우리 아이들 형제가 함께 찍은 사진, 우리 4식구 가족 사진, 돌아가신 어머님 흑백 사진... 한장씩이 정지된 순간으로 액자 속에 갇혔다. 마지막 남은 에이포 용지 크기의 가장 큰 액자에 어떤 사진을 넣을까를 고민을 하고 있는데 아내가 처녀 시절 사진을 건네 주었다. 개나리가 만발한 어느 봄날 어느 절인지 단청이 고운 루각 앞에서 무슨 모델이라도 되는 듯이 한껏 폼을 잡고 찍은 약간은 촌스러운 사진이었다. 그 사진 속에는 내가 모르는 아내의 과거 어느 한 순간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흘러간다. 오늘이 어제가 되고 현재가 자꾸자꾸 과거가 되어 달려간다. 앨범을 꺼내 보면 아름다운 과거가 화석인 양 웃고있다. 또 한 십년쯤 지나면 나와 우리 가족의 오늘의 모습은 어떤 추억으로 남아있을까? 가는 세월을 잡을 수도 없고 오는 세월을 막을 수도 없고 그저 오늘과 현재에, 한 순간 순간에 충실하게 살아야 할텐데... 나의 인생의 시계는 지금 몇시인가? 그리고 내 인생의 정북은 어디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