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일암 가는 길
불일암 가는 길
.... 어느 절집이든 속세의 번거로운 발길을 곧바로 허락하지 않는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아름다운 거리를 확보하고 있다. 마치 산에 피는 꽃이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는 것처럼 우리는 그 길을 통하여 마음을 씻고 이윽고 부처님이 계시는 구도자의 도량, 산사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길은 道로 통한다.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한 단계 한 단계 세속의 번뇌를 벗어버리고 청정한 몸과 마음이 되어 부처님 앞에 도착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 형권의 <山寺> 머리말 중에서)
시도 때도 없이 고개를 드는 역마살은 어쩌지 못하고 바람을 쐬러 어디론가 길을 나선다. 차를 몰아 화순 너릿재를 넘고 주암호를 굽이굽이 돌아 송광사로 간다.
청량각을 건너기 직전에 새로 길이 났다. 건너 편 구 길이 자동차를 위한 길이고 새 길은 걸어 들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길이다. 이 길을 위해 새로 다리를 몇 개 놓았는데 솜씨가 영 별로여서 눈 맛이 안 난다. 돈 받은 만큼 일한 사람들과 다리 공덕으로, 불심으로 다리를 놓는 사람들의 차이가 만들어낸 결과다. 기계가 깍은 것과 사람의 손이 깍은 것의 차이다.
그 길로 들어가다 보면 제일 먼저 탑전이 나온다. 그 탑전 옆에 있는 장엄한 편백 나무 숲 사이로 난 오솔길이 소요를 유혹한다. 팻말 하나가 없다. 딱히 뭘 하자고 나선 길도 아니니 그 길을 따라 걷는다. 길에서 만난 스님에게 물으니 불일암 가는 길이란다. 지금은 떠나고 안계시지만 法頂 스님이 오래 머물렀던 암자다. 그렇게 자주 오고도 길을 몰라 가보지 못한 불일암인데 이 길이 불일암 가는 길이라니... 가다가 갈림길이 나오면 아랫 길로 가라고 친절하게 일러주는 그 스님의 얼굴이 물빛처럼 말갛다.
산비탈을 오르기 시작하는 길에는 낙엽이 두텁게 쌓였다. 날은 봄날처럼 포근하다. 봄비처럼 소리 없이 비를 뿌리는 길. 너무나 호젓하다. ‘철학자의 길’이라 이름 붙이고 싶은 길이다. 이 길을 걷고 있노라면 누구라도 생각이 깊어질 것 같다. 새 소리, 바람 소리, 물소리...가 나를 따라 온다. 이 길을 걷고 있노라면 먼지처럼 겹겹이 내려앉은 마음의 때가 다 씻어 내릴 것만 같다. 洗心의 길이다. 갈림길이 나왔다. 연꽃을 새긴 나무 말뚝에는 그냥 ㅂ 자만 쓰여있다. 다시 잠시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편백 숲을 지나고 잡목에 산죽이 길옆에 도열한 길이 끝나니 이제부터는 대밭이다. 장엄한 대밭 속으로 오솔길은 이어지고 있다. 대 숲 길옆에 통나무 등걸을 베어낸 의자 두 개가 잠시 앉아 쉬어가라고 손짓을 한다. 터널 같은 대숲 길을 나서니 앙증맞은 대문이 마중을 나왔다. 동안거 기간. 개방시간이 오후 1시 반이라고 씌여 있다. 걷기에 딱 좋은 거리, 걷기에 딱 좋은 길이다.
여기다. 법정 스님이 새와 바람을 벗하고 살았던 선방, 水流花開室이 있는 佛日庵이다. 법정 스님이 손수 만들었다는 참나무 의자가 암자 앞에 그대로 놓여져 있다. 거기 앉아본다. 대숲 너머로 마주 서는 조계산의 영봉들... 이런 기분이 청량이고 소쇄일까? 한쪽에 곱게 쌓아놓은 장작 벼늘도 그렇게 정갈할 수가 없다. 모든 것이 마알간... 풍경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암자다. 정 찬주 선생이 쓴 그대로 ‘암자란 속 뜰을 맑히는 비질 자국이 선명한 곳, 의자는 산중을 떠도는 고독을 위해 비어져 있고 암자는 입선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