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사와 꽃샘추위 그리고 눈발....
D 잡지에 실을 나의 여행기를 위해 사진기자가 내려왔다.
가는 날이 제삿날이라더니 하필 오는 날이 꽃샘추위다.
벗었던 두툼한 겨울 옷을 다시 꺼내 입고 갔는데도
영하로 곤두박질 친 수은주에다
성난 이리떼 처럼 이리저리 쓸고다니는 바람 때문에
이가 덜덜 떨리도록 추웠다.
며칠 전 강진은 완전한 봄이었는데
송광사로 가는 길에도, 송광사에서도
봄의 색깔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길게 목을 빼고 담 밖을 두리번 거리고 있는
산수유 나무들만이 노오란 색깔을 막 밀어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말 잘 듣는 유치원 아이처럼 여기 저기 다니면서 그가 요구하는대로 수 백 커트를 찍었다.
실제로는 두 세 커트나 쓰려나 모르겠다.
심술궂은 바람은 자꾸만 잘 빗고 나온 머리카락으로 몇 개씩 제비집을 지어놓고
여선생님을 놀려 먹는 악동들 처럼 여자들의 스커트를 뒤집어 놓고는 달아났다.
뾰얗게 흙먼지를 쓸어다가 사정 없이 뒤집어 쒸우기도 했다.
대웅전 앞에서, 심우도 앞에서, 척주당과 세월각 앞에서, 보조국사 사리탑 앞에서,
대밭에서, 송광사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서, 구산선문에서....
강추위 속에서도 촬영은 계속 되었다.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 천국으로 돌아왔다.
하얀 햇살이 찾아드는 찻집의 방은 천국 같았다.
언 가슴을 데우면서 가슴으로 마음으로 흘러드는 차맛이 좋았다.
창밖에는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동토의 나라인데
차향이 가득한 다방은 따뜻한 남쪽 나라였다.
오후 3시가 넘어서야 산장식당에 내려왔다.
잡지에 맛집으로 소개할 사진을 찍는다고 했더니
산채정식, 산채비빔밤, 부치개, 도토리 묵...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많이도 차려왔다.
남도의 맛깔스런 음식에다 최고의 반찬인 시장끼 까지 얹었으니
마파람에 개눈 감추듯 접시들을 비워냈다.
함포고복의 즐거움으로 오후의 햇살이 기울었다.
절을 나서는데 희끗희끗 눈발이 부나비 처럼 차창으로 날아든다.
춘삼월에 눈발이라니...
눈발은 점점 굵어지더니 함박눈 처럼 내린다.
이내 산과 들이 서리가 내린 듯 하얗게 변했다.
온종일 사흘 굶은 시어머니 얼굴 처럼 한껏 지푸린 채 변덕이 죽 끓듯 하는 날씨였다.
구름 끼고 해 뜨도 바람 불고 눈 내리고....
그래도 그 추운 길을 말없이 따라와 주는 길벗이 있어 마음은 늘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