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변정담(爐邊情談)

곡성의 관음사 탐방

소한재 2007. 3. 27. 19:05

성덕산 관음사(聖德山 觀音寺)

전라남도 곡성군 오산면 선세리 1-1

조계종 제21교구 송광사 말사

 

성덕산(聖德山) 관음사(觀音寺)는 심청전(沈淸傳)의 원전이 된 연기설화로 유명한 백제고찰이다. 이 절이 창건된 것은 백제 분서왕 4년(AD301)의 일이다. 이 때 성덕(聖德)이란 처녀가 바다에 떠밀려 들어온 관세음보살님을 모시고 이 곳으로 와 절을 이룩했다고 전한다.

우리나라에 많은 사찰이 있지만 연기설화에 처녀를 개창주로 한 절은 관음사가 유일하다. 더욱이 이 성덕처녀가 바다에서 발견한 관세음보살은 전설적인 소설 심청전의 주인공 심청이가 띄워 보낸 것이라고 전해온다.

그래서 관음사가 있는 전라남도 곡성(谷城)군은 요즈음 심청이를 되살려 군의 상징을 삼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다.

 

<관음사 가는 길>

관음사는 남해고속도로 옥과(玉果)IC에서 내려 화순 동복(同福)으로 가는 15번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가야 한다. IC를 벗어나 8km쯤 가면 길가에 장승이 많이 서 있는 효공원을 만난다. 심청이의 효심을 일깨우기 위해 주민들이 만든 소공원이다. 이 공원에는 소설 심청전에 나오는 인물들을 장승으로 조성, 전시하고 있다. 이른바 캐릭터공원인 것이다.

 

이 효공원을 사이에 두고 15번 국도에서 왼편으로 갈라져 들어가는 지방도가 있다. 관음사는 이 203번 지방도로를 따라 다시 5km를 더 들어가야 한다. 그러니까 효공원은 관음사가 지니고 있는 심청이의 전설을 일깨우기 위해 그 들머리 삼거리에 조성한 것이다.

 

관음사로 들어가는 5km의 도로는 저만큼 계곡을 내려다보며 산기슭 길을 달린다. 나무 사이로 스쳐가는 전경이 지금은 대다수 전답으로 변했지만 옛날 관음사가 처음 자리를 잡을 때는 계곡이 절경을 이루었을 것이라고 가늠해 보기가 어렵지 않다. 관음사는 포장도로가 끝나는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심청전의 원전이 된 연기설화>

지금 관음사는 심청전의 원전이 된 연기설화를 되새기며 신도들의 복전이 되고 있고 곡성군민들이 심청의 효심을 숭상토록 하는 원을 성취해 가고 있다.

관음사의 연기설화는 이러하다.

 

충청도 대흥현(大興縣-충남 예산군 대흥면) 홍법사(弘法寺) 성공(性空)스님이 금강불사를 이루고자 화주승이 되어 시주를 찾아 나선 길에 장님인 원량(元良)을 만나 시주를 해줄 것을 부탁했다. 스님은 평소 같으면 가난한 원봉사에게 시주해 달라고 말하지 않았겠지만 간밤 꿈에 부처님이 현몽하여 “내일 아침 절을 나서면 장님을 만날 것인데 그가 대시주가 될 것”이라고 일러주었기 때문이다.

 

이 말을 들은 원봉사는 놀라 어리둥절하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으나 꼭 시주를 하라고 한다면 딸 홍장(洪莊)이라도 내놓겠다.”고 했다. 평소 효심이 지극한 16세의 처녀 홍장은 이 말을 듣고 한없이 울었으나 아버지가 한 약속이라 끝내 스님을 따라 나섰다.

 

스님은 홍장을 데리고 또 다른 시주를 찾아다니다 소량포(蘇良浦-완도군 금일도) 언덕에서 잠시 쉬게 되었다. 이 때 바다에서 배 두 척이 다가와 사람들이 내리더니 갑자기 홍장을 보고 왕후마마라고 불렀다.

 

그들은 진(晋)나라 사람들로 왕께서 영강(永康-AD300) 정해 5월 신유일에 왕후를 잃고 슬픔에 젖어 있는데 어느 날 신인이 현몽하여 새 왕후가 동국에서 태어나 벌써 16세에 이르렀으므로 배를 소량포에 보내 원홍장을 맞아오라고 하여 찾아왔다는 것이다.

 

<황후가 된 심청이-홍장>

이에 따라 홍장은 진나라 사람들이 두 배에 가득히 실어온 금은보화를 성공스님께 시주하고 자신은 진나라로 건너가 왕후가 되었다. 왕의 사랑을 한 몸에 받게 된 홍장 왕후는 마노탑(瑪瑙塔) 3천개를 만들어 여러 나라에 모시게 하였고, 고국을 위해서는 53불과 500성중, 16나한을 조성하여 세척의 돌배에 실어 보냈는데 이 배들이 감로사(甘露寺) 앞에 닿아 이 절에 봉안하게 되었으며 금강사(金剛寺)와 경천사(擎天寺-풍덕현=현재 경기도 개풍군)에는 탑을, 그리고 아버지의 복락을 위해 홍법사에 불상과 탑을 조성하여 모셨다고 한다. 이 탑은 일제 때 일본으로 가져갔던 것을 되찾아와 경복궁에 모셔졌는데 지금 국보86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런데 홍장의 아버지 원량은 딸을 보낸 뒤 눈물로 지새다가 어느 날 성공스님으로부터 홍장이 진나라의 왕후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너무 반가와 눈을 번쩍 떠 마침내 세상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바탕이 돼 조선시대에 이르러 소설 심청전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설화가 관음사와 연관지어 진 것은 홍장 왕후가 여섯 번째의 불사로 한분의 관음성상을 조성하여 인연 닿는 곳에서 모시라고 하면서 돌배에 실어 동국으로 보낸 것이 지금의 벌교(筏橋)인 승주낙안포(樂安浦)에 도착한 것을 성덕아가씨가 업어와 이 곳에 모시고 절을 지었다는 것이다.

 

<떠들어 온 빈 돌배>

낙안포에서는 빈 배가 떠들어오자 관가에서는 적선이 아닌가 해서 추격에 나섰으나 도무지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다음날 옥과에서 온 성덕아가씨가 바람을 쐬기 위해 바닷가에 나갔다가 빈 배를 발견하고 다가가니 비로소 배가 움직이지 않고 머물러 있었다고 한다.

 

성덕아가씨는 배위에 관음성상이 계시는 것을 발견하고 엎드려 예배한 후 등에 업으니 가볍기가 홍모(鴻毛-기러기털)와 같았다. 성덕아가씨는 그 길로 옥과를 향해 달리면서 11군데의 정자에서 쉬어 지금의 관음사 터에 당도했다.

 

성덕아가씨는 자신의 고향의 구일정(九日亭)에 열 번째로 도착, 여기에 성상을 모실까 하고 9일 동안 생각하다 다시 길을 나서 운교(雲橋)마을 앞 정자에서 열한 번째로 쉰 후 화순 땅 백아산(百鴉山)으로 가려고 하늘재(天峙)를 넘으려는데 그동안 무게를 느낄 수 없던 관음성상이 갑자기 태산을 짊어진 듯 무거워 성상을 모실 터가 가까워졌음을 알고 고개를 내려다 보니 앞쪽에 시내가 흐르고 뒷산은 좌청룡 우백호가 벌려 있어 여기라고 생각한 후 고개를 내려가 성상을 모신다음 절을 짓고 이름을 지으니 관음사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뒤에 산 이름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 관세음보살을 시봉한 성덕아가씨의 이름을 따 성덕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심청의 고향은 곡성 도화촌>

지방자치 시대가 열리며 관음사는 새로운 각광을 받게 됐다. 송광사에 보존된 관음사의 연기설화를 보고 곡성군이 심청의 고향찾기에 나선 것이다. 그 결과 효녀 심청은 백제 고이왕 말년(AD286) 곡성군 오곡면 송정마을 도화촌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젓동냥으로 자라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섬진강을 따라 곡성까지 온 중국상인들에 의해 그 소문이 중국에까지 알려져 백제 분서왕 4년(AD301) 중국 회계국의 상인이며 제후국의 왕이기도 한 심국공의 아내로 팔려갔는데 당시 심국공의 부하들이 심봉사를 안심시키기 위해 조금 부풀려 왕후로 팔려간다고 한 것이 소설의 줄거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비가 된 홍장(심청)이 백제 비류왕 9년(AD312)에 고국에 관음성상을 보내와 지금의 성덕산에 모신 것이 관음사의 창건이라고 한다. 이에 따르면 관음사의 창건은 창건연기보다 11년가량 뒤로 물러나게 되는 셈이다.

<불타버린 문화유산>

지금 관음사의 전각은 7동에 이른다. 그러나 지난날 관음사의 모습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이 컸다. 임진왜란 전에는 계곡이 80여동의 크고 작은 전각들로 꽉 찼으나 전란으로 불타 버렸고 6.25동란 전까지도 20여동의 전각이 있었으나 공비들이 은신하고 있다하여 작전상 불을 질러 고려시대 건물로 당시 국보 273호로 지정돼 있던 원통전이 불타면서 그 안에 모셔져 있던 금동관음보살상(국보214호)도 함께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다.

 

관음사는 창건 후 고려 공민왕 23년(AD1374) 5창 되었으나 정유재란으로 당우가 거의 불타고 원통전만 남았는데 이마저 6.25때 불타게 된 것이다.

 

관음사는 조선시대에도 세 차례나 중창불사가 있었고 6.25 후에는 인근 대은암을 옮겨와 원통전을 복원하고 계속 불사를 이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절 앞 하천에 다리를 놓고 그 위에 금랑각(錦浪閣)을 세웠으며 금랑각을 넘어서면 천왕문이 있고, 천왕문을 들어서면 전면에 원통전이 편안하게 자리를 잡았다. 원통전 앞에는 좌우에 궁현당과 성원당이 벌려서 있었으나 최근 들어 궁현당이 불타버려 이를 계기로 천불전을 신축하고 궁현당은 자리를 옮겨지었다.

 

관음사를 참배하고 시간이 남으며 섬진강을 따라가다 심청마을인 도화촌에도 한번 들려봄직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