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 散考
“귀댁의 제사는 안녕하십니까?”
며칠 전에 아버님 제사를 지내러 서울 조카 집을 다녀왔다. 솔직히 제사상 앞에 엎드려 고작 절 몇 번하려고 온 가족이 그 먼 길을 다녀와야 하나 하는 허망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막내인 나는 말할 것도 없고 고희를 바라보는 둘째 형님도 술 한 잔을 올리지 못한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시아버지 제사를 지내러 가야하는 아내의 표정에서도, 함자 석 자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러 가야하는 우리 둘째 녀석의 표정에서도 아무런 감흥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천리 길을 달려가도 아내는 제사상 앞에 서지도 못한다. 여자이기 때문에. 사실은 제사를 지내러 가는 것이 아니라 일하러 가는 것이다.) 나는 제사를 지내러 다녀올 때 마다 ‘이렇게 지내는 제사가 앞으로 얼마나 갈까?’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아마 우리 세대는 열심히 제사를 지내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기 제삿밥은 얻어먹지 못하는 첫 세대가 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살아 계시 듯 제사 시간이 가까워지면 대문도 열어두고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을 진설하고 거듭해서 잔도 올리고 하지마는 그 시간에 정말 조상신이 와서 흠향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러니 우리 아이들 눈에는 영락없는 미신이요 이해할 수 없는 비합리적 처사일 수밖에 없다.
방에서 마루로 그리고 마당으로 밀려서 넘쳐 흐르던 제관도 해마다 줄어 지금은 가까운 직계손 몇 명만 제사에 참석 하는 게 당연한 공식처럼 되어버렸다. 명절 때 여행지에서 콘도 측이 차려놓은 제사상 앞에서 합동으로 지내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오죽하면 그 완고한 유림이나 성균관조차도 그런 제사를 인정한다고 발표하겠는가?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과연 제사를 지내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회의하고 있는 것 같다. 비단 우리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거의 모든 집안에서 지금 제사가 문제가 되고 있는 듯 하다.
제사는 토지를 기반으로 하던 농경사회의 풍습이었다. 앞뒷집으로 아니면 앞 동네 뒷동네로 살림을 나던 그 시절에는 제사에 참석하는 게 마실 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서울로 대구로 광주로 흩어져 사는 산업화 시대에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몇 백 키로를 이동해야 한다. 매인 몸으로서 공휴일이나 주말도 아닌 평일 날 그것도 한 밤중에 지내는 제사에 참석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런 세태를 쫓아 첫 닭이 울고서야 자던 눈을 비비고 일어나 비몽사몽간에 지내던 제사는 초저녁으로 바뀌었다.) 우리 세대는 또 그렇다 치더라도 다음 세대는 부산으로 목포로 인천으로...가 아니라 뉴욕으로 홍콩으로 모스크바로... 흩어져 살게 될 텐데 추억의 한 조각도 갖고 있지 않은 증조 할머니 제사를 위해 비행기를 타고 몇 만 키로를 날아올까?
오늘날, 종교의 자유는 기본적인 인권이다. 구한말 천주교 박해의 가장 큰 이유는 서학쟁이 천주교도들이 조상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이 유교를 근본으로 하는 나라에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수 없이 제사를 지냈지만 단 한번도 제사가 종교 의식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기독교인에게 우리의 제사는 의심할 바 없는 유교적 종교 의식인가 보다. 조상의 신위에 절하고 제사 지내는 것을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한 십계명을 어기는 것으로 생각한다. 오늘날 자손들 중에는 그런 이유로 아예 제사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도 많아졌다. 마지 못해 와서도 남들이 다 엎드려 절할 때 뻣뻣이 서 있어 제사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 것 때문에 가족애나 후손간에 우의를 다지는 계기가 되어야할 제사가 가족 간에 불화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가난한 집에 제사 돌아오 듯 한다’는 우리 속담 처럼 제사는 많기도 하다. 고조할아버지, 고조할머니, 증조할아버지, 증조 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또 일부다처제의 옛날에는 후실들도 많고 거기다가 훌륭한 조상이라 四代奉祀의 의무에서도 해방되는 不遷位 제사라도 한 두 개 끼고 나면 정말 자고 돌아서면 또 제사다.
요즈음 제사에 쓸 배 한 개를 사는데 오 천 원이 보통이다. 제사는 이러한 단순한 경제적인 부담뿐만 아니라 제수를 준비하랴 제사 음식을 준비하랴 제관들을 접대하랴 엄청난 골몰이 동반되는 대사다. 오죽하면 명절 끝에 몸 져 눕는 명절 증후군이라는 신종 주부 병이 생겼겠는가? 종가집의 일이라는 게 奉祭祀 接賓客 조상의 제사를 잘 모시고 손님을 극진히 대접해 보내는 게 전부이다. 종가집이 아니더라도 그 횟수에 많고 적음만 있을 뿐 봉제사 접빈객의 의무는 쳇바퀴 돌 듯 때가 되면 어김없이 돌아온다. 우리 집안 큰 집 장질부도 몇 해 전부터 양위분을 한 번에 지내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해와 “어허 그거 참... 그 거 참...” 집안의 어른들인 형님들조차 혀를 끌끌 차면서 쓴 입 맛만 다실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옛날에는 종가의 종부는 정경부인이 부럽지 않다고 할 만큼 대단한 존경과 권세가 따르는 영광된 자리였다. 드넓은 전답(위토)과 고대광실에다 대소가 아녀자들을 불러 턱으로 일을 시키고 손에 물 한방울 묻힐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요즈음 종부나 맏며느리들은 그 영광은 ‘아, 옛날이여~’가 된 지 오래고 오로지 그 엄청난 의무만이 좁은 두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대소가의 손 아래 동서들이 하나 둘이 아니건만 이런 저런 핑계로 제삿일의 고역에서는 미꾸라지 빠져 나가듯 잘도 빠져나간다. 큰 집 형님에게는 알량한 돈 봉투 하나 보내고 시부모님에게는 후한 용돈 봉투를 내미는 것으로 가비얍게 그 노역에서 벗어난다. 오늘날의 맏며느리는 이빨 빠진 종이 호랑이다. 손 아랫 동서들을 불러다 일 시킬 수 있는 권세도 명분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고통을 너무나 잘 아는 이 땅의 어머니일수록 맏며느리에게는 그 고역을 강요하면서도 내 딸은 기를 쓰고 남의 맏며느리로 보내지 않는다. 안동 같은 지방에서는 종갓집 새 종부가 어느 날 갑자기 예배당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다달이 돌아오는 조상 제사를 분연히 거부하고 나서는 사례가 빈발, 이 지방만의 사회 문제로 등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집의 경우 고향 마을 뒷산에 부모님이 나란히 누워 계신다. 아버님이 형제 중 막내인지라 제사래야 어머니 아버지 일 년에 두 번이 고작이다. 그 산소 아래 고향 마을에는 아직도 伯氏 형님 내외가 부모님이 물려주신 손바닥만한 자갈 논 몇 마지기와 부모님 산소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몇 해 전부터 형수님 건강이 나빠져 도저히 제사를 모실 수가 없게 되자 하는 수 없이 서울에 사는 장조카 집으로 제사를 넘겼다. 그 이후로는 고향에 사는 큰 형님도 제삿날에는 아들 집으로 제사를 지내러 올라오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대구에 사는 다른 형님들과 광주에 사는 나는 자동으로 서울 장조카 집으로 가족들을 끌고 제사를 지내러 가야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나에게는 어머니 아버지지만 장조카에게는 할머니 할아버지다. 큰 형님이 제사를 모실 형편이 못된다면 둘째 셋째... 아들인 우리가 지내야지 장조카인 아랫대로 넘어가야하는 것도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예법이다. 아들을 두고 손자가 제사를 모셔야 한다니...?
고향에서 큰 형님이 제사를 모실 때는 그래도 그리운 고향 산천을 찾아가는 즐거움이라도 있었다. 부모님은 가고 없지만 그래도 유년의 추억이 배인 고향집을 찾아가는 즐거움이라도 있었다. 제사 지내러 간 김에 아이들 손잡고 뒷산 마루에 있는 부모님 산소도 찾아보고 이제는 내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세 벌 쌀에 미만큼도 남아있지 않지만 그래도 고향 사람을 만나 안부를 묻는 즐거움이라도 있었다.
기제사는 물론 명절 때마다 엄청난 교통체증에 시달리면서 서울 조카 집으로 제사를 지내러 가는 기분이 솔직히 썩 유쾌하지 못하다. 가야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가는 것이지 내가 좋아서 가는 것은 아니다.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갑게 맞아주는 어머니가 계시길 하는가? 옷고름 입에 물고 담 뒤에 숨어 그리운 정을 전해주던 고향 처녀가 있기를 하는가?
우리 아이들도 제사를 지내러 가야한다는 나의 강요에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오만상을 찡그리며 따라 나선다. 그 아이들에게 조상 제사를 모시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를 논리정연하게 설득해 낼 자신이 없다. 그러니 인상을 쓰면서 뒷걸음치는 아이에게 버럭 고함부터 내지르고 본다.
한 사람의 장례식에서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면서 염불을 하고 돌아서면 바로 뒤이어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찬송가가 울려 퍼진다. 그 앞에 누워 저승길을 가야하는 영혼은 극락엘 가야하나? 천당에를 가야하나? 망자와 남은 가족 간에 종교가 다른 데서 벌어지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제사의 긍정적인 취지라는 것은 있었을 텐데 지금은 그런 취지는 다 사라지고 오로지 형식만 남아 있다. 제사를 준비해야 하는 맏며느리 경우에 옛날 정경부인도 부럽지 않다던 권세는 사라지고 지금은 무거운 의무만 남아있다.
그렇다면 이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오늘 날의 제사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조상조차도 후손들에게 고통만 안겨주는 제삿밥을 얻어먹으면서 그리 행복해 하실 것 같지도 않다.
해마다 지내는 제사건만 지낼 때 마다 學生이라고 쓰는 게 맞다느니 處士라고 써야 옳다느니 수저 옮기는 순서를 놓고, 앞뒤 좌우로 늘어놓는 제물의 진설 방법을 놓고... 옥신각신 입씨름이 벌어진다. 家家門禮라더니 집집마다 제사 예법도 다른 모양이다.
어머니는 생전에 입이 좀 짧았다. 비린 내 나는 고기를 일절 입에 대지 않았으며 잘 드시는 과일도 별로 없었다. 바나나를 하나하나 떼서 따로 팔 던 시절. 외국에서 수입해온 바나나는 엄청나게 비싼 과일이었다. 어머니는 유난히 그 바나나를 좋아하셨다. 그래서 어머니 제사상에는 반드시 큼직한 바나나 다발을 올린다. 옛 예법에는 없는 것이지만 어머니가 좋아하셨던 과일이니까 우리는 그것을 올린다. 어떤 집은 망인이 담배를 좋아 했다고 해서 담배를 제사상에 올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조상을 생각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니 예법에도 없는 상 것들의 본 데 없는 짓거리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논어를 읽다 보니 제사에 대해서 이런 구절이 나온다. 曾子曰 愼終追遠하면 民德이 歸厚矣니라. 증자께서 가라사대 “부모의 상에는 예를 다하고 조상의 제사에는 공경함을 다하면 백성들의 덕이 두터워질 것이다.” (논어 學而 편) 그저 공경하는 마음을 다해라. 그것이 전부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은 몬테나주 강 가의 장로교 리버런드 맥클레인 목사 집안의 가족사를 잔잔한 감동으로 그려내고 있는 영화다. 아버지이자 목사인 맥클레인에게는 노먼과 폴 두 아들이 있다. 맏아들 노먼은 동부의 대학에 들어가 문학을 공부하고 동생 폴은 고향에서 신문기자로 활동하면서 낚시를 인생의 최고의 목표처럼 여기면서 산다. 신중하고 지적인 노먼과 동적이고 자유분방한 폴은 어린 시절부터 형제애가 깊으면서도 경쟁적인 관계다. 영문과 교수로 채용되어 시카고 대학으로 떠나는 날 동생, 폴은 사고로 죽는다. 비통한 아버지 맥클레인은 그 사람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어도 그 사람을 완전하게 사랑할 수는 있다는 마지막 설교를 한다. 영화에서 아버지 맥클레인은 맏아들 노먼에게 ‘너는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니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글로 한번 써보라’고 말한다. 이 영화는 그 아들 노먼 맥클레인의 자전적 소설, <A River Runs Through It>을 원작으로 제작된 영화다.
나의 한 동료는 그 이야기와 함께 그렇게 말했다. 그의 둘째는 간디학교를 졸업하고 올 봄에 K 대학 사진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그 둘째에게 그 목사처럼 그렇게 말했단다. “너는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니 우리 가족 이야기를 한번 사진에 담아봐라. 그리고 나중에 아버지 어머니가 죽고 나면 너희 형제가 모여서 그 사진 수 백 장을 담은 슬라이드 쇼를 보면서 아버지 어머니를 추억해라. 거창하게 제사상 차릴 필요가 없다. 그것이 내가 바라는 제사다.”
언제던가 아내가 우리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몇 푼 되지도 않겠지만 자식들에게 유산을 물려주고 싶은 마음은 없다. 어머니 아버지가 죽고 나면 쓰다 남은 돈과 재산은 반을 나누어 그 돈을 꼭 필요로 하는 곳에 기부를 하고 나머지 반은 너희 형제에게 밥값으로 남긴다. 어머니 아버지 제삿날이 되면 어디에 살던 너희 둘은 가족들을 데리고 와서 함께 만나라. 그리고 그 돈으로 품위 있는 곳에서 어머니가 사주는 밥이라고 생각하고 그 맛있는 만찬을 즐겨라. 그러면서 아버지 어머니와의 즐거웠던 추억을 이야기하면서 그 밤을 보내라.”
우리의 추석은 잘 아시다 시피 그 해의 첫 수확물을 조상님에게 바치는 Korean Thanks Giving Day, 추수감사절이다. 옛날, 못 먹고 못 살던 시절에는 평소에 맛 볼 수 없었던 귀한 음식을 장만해 조상에게 먼저 바치고 제사 후에 조상이 내리는 음복으로 그 음식을 나눠 먹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러나 요즈음은 제사 음식이 남아돈다. 옛날에는 주인 몰래 싸가던 제사 음식을 요즈음 싸줘도 안가지고 간다. 그만큼 평상시에 잘 먹고 잘 산다. 귀신을 쫗는다고 해서 제사 음식에는 빨간색과 마늘을 쓰지 않는다. 양념의 기본이랄 수 있는 고춧가루와 마늘이 빠진 음식을 맛있다 먹을 젊은이가 얼마나 될까?
뭐니 뭐니 해도 제사가 갖는 가장 중요한 의의는 뿌리 교육 내지는 나로 이어지는 네트워크의 확인에 있을 것이다. 한 국가나 한 민족의 역사만 역사가 아니다. 작은 한 가족의 변천사도 나 개인에게는 소중한 하나의 역사다. 내가 하늘에서 떨어진 존재가 아니듯 내 아들 또한 어느 날 갑자기 땅에서 솟아난 존재가 아니다. 나는 잔가지이며 내 자식은 그 가지 끝에 달린 작은 하나의 잎사귀다. 조상은 바로 그 가지의 줄기요 뿌리다. 가지 없는 잎사귀가 있을 수 없듯이 뿌리 없는 줄기 또한 있을 수 없다.
자꾸 파편화하고 있는 개인주의 사회에서 제사는 가족공동체를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따로 따로 떨어져 독립적인 존재인 줄 알았던 그 남자와 그 여자가 육 촌 형님과 당고모로 한 조상에서 비롯된 가족이요 공동체의 일원임을 확인할 수 있는 계가가 된다. 그 날 밤 제삿밥을 드시러 오는 조상, 그 망인을 매개로 해서 떨어져 있던 조카와 아제가 하나의 가족으로 편입되는 것이다.
제사는 이제 紅東白西, 魚頭肉尾, 左抛右醯, 棗栗李枾.... 이런 진설법 위주의 형식에서 벗어나 파편화 하고 있는 혈족들을 보다 큰 하나의 가족 공동체로 결합시키는 방향으로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후손들이 아름답고 뜻 깊게 조상을 추모할 수 있는 방법은 생각해보면 많이 있을 것이다. 제사도 하나의 축제여야 한다. 후손들이 조상의 음덕을 기리면서도 즐겁게 즐길 수 있는 가족 축제로 거듭 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