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잔의 단상

낚시의 道와 樂(1)

소한재 2008. 2. 27. 01:50

낚시의 道와 樂(1)

 

나는 낚시가 싫다. 순간의 재미를 위해 한 마리의 생명이 희생되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고기가 바늘을 물었을 때 손과 팔에 전해지는 떨림... 그 손 맛(?)을 한번 보고 나면 누구라도 낚시에 코가 꿰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한다. 그 손 맛이라는 것도 고기의 입장에서는 목숨을 건 사투가 아니던가?

 

열렬한 지지자가 된 것은 그가 쓴 한 편의 글을 읽고 나서였다. <나는 분재가 싫다>라는 글이었는데 나무 가지를 제멋대로 비틀어 강제로 철사 걸이를 한 분재를 볼 때 마다 자유를 억압하고 고문하는 것 같아서 싫다는 것이었다. 가시밭 길 야당 정치인이던 그를 위해 나는 밤새 아이디어를 짜냈고 글을 써냈다.

 

내가 아는 아름다운 한 여인이 있다. 그녀의 취미는 놀랍게도 낚시였다. 낚시 경력이 30여년이나 되는 베테랑 낚시인이다. 꿈틀대는 지렁이를 뚝 뚝 잘라 끼우고, 얼음 낚시를 위해 칼바람 속에서 밤을 지새우는 것도 서슴치 않는 그녀는 나에게 하나의 경이, 그 자체였다. 그녀는 또한 독실한 불교 신자이기도 했다. 미녀와 낚시, 불교... 내 머리 속에서 이것들은 자꾸 따로 겉돌았다. 내게 낚시는 사냥과 사촌쯤 되는 잔인한 취미였기 때문이다.

 

광고 한 편이 생각난다. 전형적인 한 영국 신사가 말을 달리고 있다. 화면은 클로우즈 업으로 승마를 즐기는 신사의 표정을 보여준다. 광고가 진행되면서 그 신사의 표정은 점차 헐크의 그것처럼 일그러져간다. 그 사이 사이에 자막이 뜬다. ‘사냥의 즐거움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냥개들은 미리 길 들여진다.’ ‘한 해에 수천마리의 여우들이 사냥으로 희생되고 있다.’ 카메라가 줌 아웃으로 빠지면서 보이는 광경은 그 신사가 타고 있는 것은 실제 말이 아니라 아이들이 타고 노는 목마다. 인간의 오락을 위해 매년 수 천 마리의 여우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고발하는 잔혹한 스포츠에 반대하는 시민연맹 광고였다.

 

인터넷 카페에서 나는 늘 <빈 배>라는 닉 네임을 쓴다. 빈 배에 담은 뜻은 하나 둘이 아니지만 처음 내 자신을 빈 배에 은유하게 된 것은 월산대군의 시조가 그 시작이었다. “추강에 밤이 되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들이치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라.” 고기는 한 마리도 잡지 못했지만 뱃전에 하나 가득 달빛을 싣고 돌아오는 빈 배가 너무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낚시는 좋아하지 않지마는 낚시인들의 우상이라는 姜太公은 나도 좋아한다. 그가 위수 근처에서 낚시로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미끼도 달지 않은 빈 낚시대를 들이우고는 하루 종일 강가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누가 어찌 빈 낚시대를 드리우고 있냐니까 ‘나는 지금 고기를 낚는 게 아니라 세월을 낚고 있다네’라고 했다는데 ... 그의 고사를 반추해 보면 낚시 최고의 즐거움이 고기를 잡는데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졸업을 앞두고 추억록을 만드는 것이 유행이었다. 머지 않아 헤어질 친구들에게 이름 사진.. 주소, 전화번호.. 취미, 장래희망, 남기는 한 마디.. 등등을 묻는 사인지를 돌리고 그걸 받아 묶어 나눠 갖는 것이다. 그 때 한 친구의 취미는? 붕어 꼬시기(?)라고 쓰여 있었던 것이 어제 일 처럼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지금도 그 친구는 붕어 꼬시기를 즐기고 있을까?

 

카페에서 잠간 대화를 나눈 상대의 닉네임이 <정도조사>였다. 외계어 처럼 생경했다.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낚시 광이었다. ‘바른 길을 가는 낚시꾼’이라는 그의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내겐 낚시꾼이라는 말이 더 정감이 가는데 낚시인들은 釣士라는 어려운 말이 더 멋있나보다. 그는 어린 물고기는 절대 잡지 않으며 잡은 물고기도 돌아올 때는 다 풀어 준단다. 풀어줄 고기를 왜 그렇게 애를 써서 잡는 것인지 봉황의 높은 뜻을 나 같은 참새가 어찌 알리요마는 아무리 생각해도 ‘글쎄요’다. 그리고 낚시터를 더럽히고 쓰레기를 남기는 사람은 진정한 낚시인이 아니라는 점을 두고 두고 강조했다.

 

나도 몇 번 친구를 따라 낚시를 가본 적이 있다. 민물 낚시, 바다 낚시... 지난해 가을엔 배를 타고 나가 밤새 은갈치를 낚은 적도 있다. 물 반 고기 반이라더니 내가 따라간 낚시는 늘 물 뿐이었다. 소 뒷 발에 쥐 잡히듯 눈 먼 고기 몇 마리를 낚은 적은 있으나 기다림은 너무나 길었고 손 맛은 너무나 짧았다. 허긴 낚시에 문외한이니 어쩌면 초라한 조황은 너무나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내가 요즈음은 자주 낚시 채널을 본다. 낚시꾼과 물고기의 한 판 승부에는 늘 팽팽한 긴장감이 살아있다. 낚싯대가 활처럼 휘어지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내가 살아있다는 생명감을 느낀다. 고기를 잡기 위해서는 우선 고기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고기의 습성이라든지... 어떤 것을 어떤 곳을 좋아하는지...

 

몬테나 주 강가. 허공을 가르는 플라잉 낚시를 통해 잔잔한 가족사의 감동을 그렸던 영화 ‘흐르는 강물 처럼’(A River Runs Through It)의 아름다운 포스터도 생각이 난다. 흔히 낚시를 인생에 비유한다. 기다림의 철학과 리듬의 미학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 푸른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 싼 곳, 흰 구름이 자욱한 그 곳에 집을 짓고 어부인 양 대나무 장대에 도롱이에다 삿갓을 젖혀 쓰고 강 가 모래밭으로 십 리를 내려가도 날아가는 건 흰 물새뿐이로다. 돛을 높이 달고 한 너른 바다로 노 저어 내려가 큰 잉어를 낚아 올리니 저 유명한 송강의 농어가 이에 비길텐가? ... (처사가 중에서)

 

우리의 산수화 속에도 낚시하는 노인이 예정된 시나리오 처럼 숨어있다. 소한재 거실에 걸려있는 문인화에도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아이가 수면 위를 날아가는 물새 떼를 바라보고 서있다. 자연과 내가 둘이 아닌 몰아의 경지. 물비늘이 햇살에 반짝이는 호숫가에 낚시를 드리우고 세상을 건너온 바람에 마음을 씻고 있노라면 그 누구나 別有天地非人間이 될 듯 싶다. 이번 주말에는 친구를 꼬셔 낚시나 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