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잔의 단상

먼지 앉은 회연서원 마루에 서서

소한재 2008. 2. 28. 02:39

산은 자주 빛 석산. 그 겨울 산 위에 쏟아지는 햇살이 따사롭다. 성주를 향해 달리는 차창에 갑자기 병풍처럼 둘러싼 솔밭을 배경으로 여러 채 기와집 추녀들이 파도치 듯 넘실댄다. <檜淵書院>, <봉비암> 이라는 표지판이 문 앞 까지 달려 나와 멀리서 찾아온 길손을 맞는다. 여기가 바로 영남 오현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寒岡 鄭逑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회연서원이다.

 

정구 선생이 제자들을 교육하던 회연 초당이 그의 사후인 인조 5년(1627)에 지방 유림들의 공의에 따라 서원이 되었고 숙종 16년(1690년) 사액되었다.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원되었다가 지금의 건물들은 대부분 1974년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보수 복원되거나 신축된 것들이다.

 

일반적으로 서원건축은 교육공간과 선현추모의 공간이 일직선상에 놓이는 전학후묘 또는 전묘후학의 구조를 갖는다. 그러나 회연서원은 비교적 좌우가 길고 평평하며 너른 지형 탓인지 그것이 나란히 놓여있다. 새로 지은 누각에 올라보면 오른 쪽에 강당과 유생들이 기거하는 동재 서재가 자리 잡았고 두 구역을 가르는 담을 사이에 두고 왼쪽에 사우가 배치되었음이 한눈에 조망된다. 그 밖의 부속건물이 이 주위를 감싸고 있다.

 

자그마한 산 앞에 / 자그마한 집 하나 / 뜰 가득 매화 국화 해마다 늘고 / 물과 구름 있으니 그림이어라. / 뉘 있어 나만큼 사치로울꼬? 이렇게 읊조리던 뜰은 비었고 한 장의 나무 판에 새겨진 노래만 남았다. 한강이 이 곳에 초당을 꾸밀 때는 뜰에 가득 매화나무를 심었다 한다. 이름하여 百梅園. 아마 옛날 그런 고사를 기억하여 최근에 심은 듯 세월의 때가 묻지 않은 매화나무들이 가지마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물 오른 눈을 달고 서있다.

 

어김없이 여기도 문마다 안으로 빗장이 채워져 있어 먼 발치에서 담 너머로 볼 수 밖에 없다. 백매원 뜰을 나와 왼쪽으로 담장을 끼고 돌면 사방을 두른 담장 안에 한강의 신도비가 서있다. 무덤으로 향하는 신도에 세우는 비라서 神道碑인데 무슨 연유로 여기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면 가득 빽빽한 비문은 읽어볼 엄두도 읽어낼 재간도 없다. 기품 있는 솔밭을 지나 뒤로 올라서니 강당으로 내려가는 길이 열려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 홑처마 맞배 지붕의 강당 건물은 이마에 회연서원이라는 현판을 붙이고 오랜 풍상을 곱게 견딘 기품 있는 모습으로 서있다. 강당 안 벽에는 미수 허목의 빼어난 글씨로 된 望雲巖, 玉雪軒 편액이 좌우에 걸려있다. 왼쪽 측실 옆 퇴보 위에도 미수 글씨의 현판이 또 한 장 걸려있다. 不槐寢. 부끄러움 없는 잠자리. 부끄러움 없는 하루를 보내고 드는 잠자리는 깃털처럼 가벼웠으리라. 선비의 하루가 보이는 듯 하다. 近畿 출신인 眉叟의 글씨가 그리 많은 것은 미수 許穆이 거창 현감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와 한강의 제자가 되었기 때문이리라.

 

정구의 자는 道可, 호는 寒岡. 시호는 文穆이다. 본관은 청주 출신은 성주이다. 아버지 사중이 성주 이씨와 혼인하여 성주에 정착했다. 그리 멀지 않은 현풍 낙동강가에 서있는 도동 서원의 주인, 한훤당 김굉필의 외증손이 된다. 21세가 되던 1563년에는 퇴계를 찾아 도산 문하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어 24세 때인 1566년에는 남명에게 나아가 덕천 문하에도 이름을 올렸다.

 

22세 때 과거를 보러 상경하였다가 명종의 외척 윤원형 등의 전횡으로 과거장이 문란함을 보고 시험에 응하지 않고 그대로 낙향한 이후로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573년 동향으로 이미 벼슬을 하던 동강 김 우옹의 추천으로 예빈시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광해군이 즉위하던 1608년 대사헌에 오르기도 했으나 시끄러운 내직을 피해 주로 외직에 있으면서 지방 학문의 육성과 백성의 교화에 자신의 이상을 심으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학문은 광범위하여 성리학 예학 지리 의학 문학 등 다방면에 걸친 것이었다. 그 가운데도 특히 예학에 밝아서 영남은 물론 전국의 선비들이 예에 대한 의문이 있으면 그를 찾아와 물었다. 仁을 중시하는 퇴계와 義를 높이 치는 남명, 두 스승의 장점을 고르게 물려받은 한강은 당시 영남인사들의 대부분이 그의 문도라고 할만큼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이곳 사람들은 한강을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회재 이 언적, 퇴계 이황에 이어 교남의 5현으로 꼽기도 하고 동향의 친구이자 문신이었던 동강 김 우옹과 함께 이강으로 부르며 자랑으로 삼는다. 그런 한강이지마는 이 곳에서 한강을 만날 수는 없다.

 

비단 여기서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 회연서원에도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지금은 쓰지 않아 먼지 뾰얗게 먼지가 내려 앉은 건물 몇 채와 굳게 잠긴 유물관 뿐이었다. 학교 건물이 학교가 아니 듯 서원 건물이 서원일 수 없다. 교육 공간과 제례 공간이 어떻게 배치되느냐? 前學後廟니 前廟後學이니 그런 형식도 중요하지마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서원에 모시고 있는 인물이 누구냐? 그 사람의 생각과 가르침의 핵심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인물을 배제하고 나면 전국의 향교가 그렇 듯이 전국의 그 많은 서원이 별로 다를 게 없는 그 나물의 그 밥일 수밖에 없다.

 

서원을 나와 작은 다리를 건너 강가에서 서원을 본다. 씻은 듯 맑은 풍경이다. 서책에 지친 선비들이 나와 이 강물에 마음을 씻었으리라. 서원이 등을 기대고 서있는 작은 봉우리의 암벽이 무흘구곡의 제일곡 봉비암이다.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 떠 대가천을 거슬로 오르며 풍광이 빼어난 아홉 곳을 골라 차례로 이름을 붙이고 노래를 남긴 그의 풍류가 깃든 곳이다. 무흘구곡은 회연서원 뒤 제1곡 봉비암에서 시작하여 제2곡 갓말소의 절벽 제3곡 무학동 배바위 제4곡 영천동 선바위 제5곡 영천동 사인암 제 6곡 유성리 옥류동 제7곡 평촌리 만월담, 제8곡 평촌리 와룡암 제9곡 수도리 용소에 이르기 까지 이어지는데 그 펼쳐진 길이가 약 30 키로에 이른다.

 

그러나 지금 나는 무흘구곡을 찾아 음풍농월할 여유가 없다. 비껴드는 오후의 햇살이 발걸음을 재촉한다. 한개마을도 돌아봐야 하고 달성의 하목정, 삼가헌과 하엽정, 태고정도 찾아 봐야 한다. 무흘구곡 탐승은 훗날을 기약하면서 그 아쉬운 마음은 무흘구곡에 바쳤던 한강의 시 한 편으로 달랜다.

 

사곡에 구름 걷혀 바위는 백 척이요 (四曲雲收百尺巖 )

바위 끝 풀꽃들은 바람 결에 머리 푸니(巖頭花草帶風髮)

이 중에 누가 알리 저 맑은 뜻을(箇中誰會淸如許)

갠 달은 하늘 복판에 그림자는 못 속에 (霽月天心影落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