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변정담(爐邊情談)

걸어서 부암동 한 바퀴

소한재 2008. 9. 15. 09:48



 












창의문(자하문)을 내려와 능금나무 길을 따라가면 작고 아늑한 동네, 부암동에 이른다.

북악산길에 가려지고 그린 벨트와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인 이곳에는

스무 채가 조금 안되는 가구가 밭농사를 지으면서 살고 있다고 한다.

한걸음씩 내디딜 때 마다 콧 속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유난히 맑다.

                                        (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걷기 여행 중에서)

 

추석날 오후. 오랫 동안 가보고 싶어했던 부암동 탐험(?)을 나선다.

둘째와 손 잡고 나서는 길이라 더욱 기분이 좋다.

원래는 지하철 경복궁 역에서 부터 사직단, 황학정으로 올라 인왕산길을 걸어

부암동으로 넘어가고 싶었지마는 기원이가 땡볕 속에서 걷는 것을 싫어하는 지라

전체 코스의 절반에 해당하는 인왕산길을 포기했다.

대신 경복궁 역 효자동에서 부터 부암동 주민센터 까지는 마을 버스를 타고 가기로 한다.

 

부암동, 날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빌던 뜬 바위가 있었던 곳이라서 이런 동네 이름을 얻었다.

버스 정류장 근처 구멍가계에서 물을 사들고 본격적인 탐험(?)길에 오른다.

능금나무길. 옛날에는 능금나무들이 많았나보다.

<환기미술관> 몇 일 전, 압해도 갔을 때 그가 신안 섬 출신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가 이 부암동에서도 살았나 보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냐랴?>등 그의 작품과 만나고 싶었지만 다음으로 미룬다.

 

푸른 숲 속에 점점이 박혀있는 반듯반듯한 집들.

그러나 한 모퉁이를 돌아서니 집은 사라지고 원시림에 가까운 숲길이다.

그리고 발걸음을 주춤거리게 만드는 살벌한 군경계초소와 군인들

그리고 사복 경찰로 보이는 사람들이 길목을 지키고 있다.

백사실로 가는 길을 물으니 근엄해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미소와 함께 친절하게도 설명해준다.

 

백사실길. 이 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어느덧 좁아지고 희미한 길이 가물거린다.

물어보려고 해도 사람의 그림자도 없다.

<도룡용이 살고 있어요>고 쓰인 작은 팻말이 서있는 걸 보니 이 길이 맞다 싶었다.

노 무현 대통령이 탄핵 사태 때문에 업무가 정지되어 있을 때

이곳으로 산책 나왔다가 처음 보고 "아니 이런 곳이 있었단 말인가?"면서

놀라워했다는 곳이다.

(서울 시내 한 복판에 이런 원시적인 아름다움이 있었다니?)

(청와대 바로 뒤에 이렇게 낙후된 동네가 있었다니?)

 

그 희미한 오솔길 끝에서 만난 비밀의 정원, 백석동천.

계곡 옆 건물 터 두 곳을 비롯해 타원형 연못과 정자터가 숨은 듯이 누워있다.

잘 다듬은 초석으로 보아 그 위에 앉아있었을 정자가 얼마나 화려했을 지를 짐작케 해준다.

조선후기 왕족이나 권세가의 별장터쯤으로 추정되는데 자세한 것은 발굴조사를 해보면 밝혀질 것이다.

 

백사실 계곡에서 걸어 세상 밖으로 나오니 금방 시끄러운 도시의 소음이 달려든다.

그 소음 속에서 세검정이 서있다.

기록에 남아있는 세검정은 시원스런 물줄기가

온산을 울리는 계곡에 평화롭게 앉아있는 정자인데

지금의 세검정은 시멘트 콩크리트 속에 답답하게 갖혀있다.

중종반정에 성공한 다음 반정의 주역이었던 박 원종이

피 묻은 칼을 씻었다해서 세검정이 되었다고 한다.

하얀 바위 위에 올라앉은 그 품새는 아주 좋은데...

지금은 사진 속에서만 멋있는 정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