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행복의 발견

가을에 젖어 양림동 산책

소한재 2009. 9. 20. 21:26
양림동은 광주 근대화 1번지라 할 수 있는 동네다. 100여년 전에 서양 선교사들이 처음 정착해 의료(광주기독병원), 교육(광주수피아여자고등학교)을 통한 선교 활동을 했던 곳이다. 어제 부터 2009 광주디자인비엔날레 프로젝트 3 : 스트리트 전시 <어울림>이 광주 양림동 일대에서 열리고 있다. 오늘은 나의 디자인비엔날레 구경을 위한 몸풀기 정도로 양림동 골목길을 느린 걸음으로 돌아보기로 한다.

 

 집에서 부터 느린 걸음으로 걸어서 10분쯤 대남로 폐선 부지에 이른다. 도심 한복판으로 기차가 다니던 길을 지금은 시민들이 나서서 아름다운 시민의 숲으로 바꿔놓았다. 광주역에서 효천역까지 10.8키로. 아직 전구간이 숲으로 조성되지는 못하고 있지마는 폐선 부지를 시민의 숲으로 조성한 것은 두고두고 잘한 일이다. 광주 사람들이 우리 다음 세대를 위해서 한 건 한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광주의 명품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광주 근대 교육의 발상지, 수피아 여고. 개교 100주년이 넘는 유서깊은 학교다. 근대문화유산일텐데 누가 관리하는 지 관리는 좀 한심해보였다. 십중팔구 학교와 광주시가 핑퐁 게임을 한 결과일 것이다.

 

 수피아 홀. 이곳에서는 디자인비엔날레 The Clue Brand 전이 열리고 있다. 쓰레기가 나오지 않는 비엔날레를 위해 폐품들을 적극적으로 재활용하고 있는 전시회다. 버려지고 잊혀진 그러나 의미있는 공간들을 찾아내 테마 그대로 어울림을 추구한 전시공간으로 재활용하겠다는 발상에는 갈채를 보내고 싶다. 홀 한가운데 피곤한 관람객이 앉아쉬라고 상품 받침대를 쌓아 올려 만든 의자가 있었는데 이 의자가 마치 설치미술전시작품 같아서 아무리 다리 아파도 거기 앉을 관객이 없어 보였다. <손대지 마세요>만 열심히 붙이지 말고 <여기 앉으세요>라고 쓴 사인을 붙여놓으라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가장 아쉬운 것은 내가 있는 동안 관객은 나 혼자뿐이었다. 겨우 이틀째인데 그리고 오늘은 일요일인데.. 파리를 날리고 있는 전시장. 거기 배치되어 있는 도슨트가 민망해할 지경이었다. 이렇게 된 데는 홍보 부족 탓도 있겠지만 뭐니 뭐니 해도 잘못된 미술 교육에 있다. 미술, 디자인... 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전람회장에서 사람들을 내쫓고 있다. 미술이나 예술은 느껴야할 것이지 알아야 할 것이 아니다. 과학은 맞고 틀리고가 있을 수 있지만 예술에는 맞고 틀리고가 없다. 오로지 너와 나의 다름이 있을 뿐이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놓고 머리로 맛을 보려 하니까 제대로 맛 볼 수가 없다. 본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아름다운 미술 작품을 앞에 놓고 가슴으로 느끼려 하지 않고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니 당연히 어려울 수 밖에 없다. 미술전시장에서 가장 즐거워하는 것은 유치원 아이들이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라.

 

 수피아 여고 안에 있는 작은 교회. 일요일이라 예배 준비가 한창이었다.

 

 양림동 숲속에는 이런 선교사들의 사택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사는 이가 없어 서양 공포 영화 세트장 같다는 게 문제이기는 하지마는. 도시마다 선교사들이 터를 잡은 곳을 돌아볼 때 마다 드는 생각. 이 양반들 풍수도 잘 모를텐데 좋은 터를 알아보는 천재적 감각을 지닌 것 같다는. 우리나라 어느 도시든 최고의 명당은 서양 선교사들의 땅이다.

 

 선교사 사택 뜰에는 꽃무릇이 한창이었다. 석산화라 부르기도 하고 꽃이 지고 난 다음에 잎이 나기 때문에 꽃이 잎이 서로 만날 수 없어 상사화라 부르기도 한다. 이 꽃무릇은 전라도 일대에 특히 많은 데 영광의 불갑사나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함평의 용천사 그리고 고창의 선운사에 가면 지금쯤 꽃무릇의 대향연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우일선 선교사 사택이다. 원래 이름이 윌슨인데 우리 우림으로 바꾸면서 성은 우씨가 되고 이름은 일선이 되었다. 윌슨이 우 일선이 되는 그 그 과정에서 현지화하고자 했던 초기 선교사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우리는 사실 이 분들에게 크게 빚 지고 있다. 그들은 잊어도 우리는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선교사 사택 골목 어귀에 서있는 호랑가시나무. 어렸을 적 크리스마스 카드에는 으례히 이 나무의 잎사귀와 열매가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 내 머리 속에는 크리스마스 나무로 남아있다. 초기 선교사들이 심은 것일까? 지금은 시지정기념물이 되었다.

 

 산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낮고 언덕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높은 그 곳에는 광주에서 활동하던 초기 선교사들의 묘지가 있었다. 흙 한 줌으로라도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하는 한국인들로서는 이해가 잘 안되는 공동 묘지다. 저 무덤 주인들의 영혼은 아직도 이곳 양림동을 떠돌고 있을까? 아니면 미국 어디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을까?

 

 이 곳 양림동은 시인 김현승이 태어나고 자랐던 곳이다. 그가 목사의 아들이어서 일까? 이 동네에 있는 호남신학대학 교정 한 구석에 그의 시비가 서있었다. 가을볕이 달그락 거리는 오늘과 딱 어울리는 <가을의 기도>가 새겨져 있었다. 옛날 연애 편지에 자주 봤던 귀절들이다. 가을 남자가 되어 조용히 외워본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時間)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호남신학대학 도서관 일층에는 <티 브라운>이라는 이름의 찻집이 있다. 창이 넓은 이 집은 차맛은 좋은데 찻값도 싸고 거기 앉아 바라보는 무등산이 좋아서 가끔 산책길에 들리는 곳이다. 차 한 잔 생각에 갔더니 <주일은 쉽니다>라는 사인이 걸려 있었다. 아... 오늘이 주일이구나..

 

 <어울림>전이 열리고 있는 양림동 이 장우 가옥. 이 집의 주인이었던 동강 이 장우 박사는 현재의 동신유치원, 동신중고, 동신여중고, 동강대학, 동신대학교를 설립한 광주의 대표적인 교육자이시다.

이 집과 최승효 가옥을 보기 위해 양림동 골목을 헤메다가 못 찾고 돌아가기를 무려 세 번. 광주디자인비엔날레 덕에 드디어 이 집을 제대로 구경할 수 있었다. 내가 오랫동안 보고 싶어했던 이 집도 보고 아름다운 전시회도 보고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다.

 

 이 장우 가옥 방안에서 열리고 있는 십인십색전. 이런 전시물 말고도 이 집 곳곳에 전시물들이 숨바꼭질하듯 숨어있다. 관객 입장에서는 보물찾기를 하듯 전시물을 찾아내는 즐거움이 덤으로 주어진다.

 

 지은 지 백 여년 정도 되는 이 집 또한 한옥의 근대화 과정을 보여주는 사료적 가치 때문에 광주시 문화재 1호로 지정되었다. 무등산에서 흘러온 지맥이 이 집을 에워싸고 있고 앞으로는 광주천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명당이다. 지금은 앞에 집들 때문에 무등산이 살짝 살짝만 보이지마는 옛날에는 대청 마루에서 무등산이 훤히 마주 보였을 것이다.

 

 대청 마루에서. 정면에 보이는 것 또한 디자인비엔날레 전시 작품인데 디지털 병풍이다. 수묵화가 계속 움직이는 그야말로 첨단 기술과 전통이 아름답게 만나고 있는 작품이다.

 

큐레이터의 밤 파티가 열렸던 최 승효 가옥. 이 집은 독립운동가 최 상현의 집으로 정면 8칸 측면 4칸의 대저택이다. 늘 대문이 닫혀 있어 일반인들이 구경하기가 쉽지 않은데 아내가 이 집 며느리와는 지기인지라 그 빽(?)으로 이 큰 집의 한 나절을 나 혼자서 즐기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그 규모나 전면의 대리석 계단 때문인지 첫 느낌은 민가라기 보다는 관가 같은 느낌이었다. 전통 한옥에서 개화기의 한옥으로 변화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사료적 가치가 높은 집이다. 숲으로 둘러쌓인 정원 때문에 지금은 현대의 한옥이라 해야할 것이다.

 

 나의 소한재 문 위에 걸어두었던 편액 安分窩(분수를 지키면서 사는 움막집)가 이 대저택에도 걸려있었서 고소를 금할 수 없었다. 허긴 양동마을의 대종가 처마 밑에 걸려있던 편액은 수졸당이었으니 분수나 졸속함에도 나와는 엄청나게 큰 차이가 있는 것이구나. 이 집의 아들중 한 명이 백남준 선생의 문하생으로 설치미술을 하는 분인 듯. 집안 곳곳에 설치 미술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양림동 광주천을 건너는 다리. 디자인비엔날레를 위한 다리는 아닌데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격으로 마치 디자인비엔날레 기념 다리처럼 보여 한 커트 찰칵!! 이 다리 건너 보이는 골목으로 들어가면 최 승효, 최 승남, 이 장우 가옥등 옛날 광주 부자집들을 만날 수 있다.

 

지금 광주에서는 디자인비엔날레가 어제 부터 오는 11월 4일까지 열리고 있다. 비엔날레란 2년마다 열리는 대규모 미술전람회를 말하는데 광주비엔날레가 열리지 않는 그 사이 해에는 디자인비엔날레가 열린다. 이번 디자인비엔날레는 The Clue : <더할 나위 없는>을 주제로 더할나위 없는 옷(clothing), 집(living), 글(enlightening), 맛(eating), 소리(enjoying) 부문별로 다양한 전시회가 비엔날레전시관과 광주시내 일원에서 열리고 있다. 요즈음 웰빙 웰빙... 그러는데 깊어가는 이 가을. 비엔날레로 문화적인 하루를 적시고 무등산과 맛있는 음식도 즐기고 가면 그야말로 몸과 마음이 웰빙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