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잔의 단상

심심한 소한재(尋心軒 & 笑閑齋)

소한재 2010. 9. 15. 09:47

심심한 소한재(尋心軒 & 笑閑齋)

 

 

 

청량산 육육봉을 아는 이 나와 白鷗(뿐)

백구야 날 속이랴마는 못 믿을 손 桃花(복사꽃)로다.

도화야 물 따라 가지 마라 어부(漁舟子)가 알까 하노라.

 

청량산 입구에는 퇴계의 이 시조가 바위에 새겨져 서있다. 청량산이 세상에 알려지는 걸 그렇게도 싫어했지마는 퇴계의 이 시조는 청량산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가장 잘 알리는 최고의 광고 카피가 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청량산 기슭에 서있는 청량정사는 퇴계가 <도산십이곡>을 썼던 곳이다. 그 청량정사는 이마에 <吾山堂>아라는 편액을 걸고 섰다. ‘나의 산’, 영어로는 My Mountain House 정도가 될 터이니 퇴계의 청량산 사랑이 절절이 와닿는다. 이렇듯 청량산을 너무나 사랑했던 퇴계는 청량산을 혼자 즐기고 싶어 했다.

 

십 년을 경영하여 초가 삼간 지어내니

내 한 간, 달 한 간, 청풍 한 간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면앙정 송 순의 시조다. 免仰亭은 ‘굽어 땅을 보고 우러러 하늘을 본다’는 이름 그대로 담양 너른 들과 하늘을 향해 앉은 정자다. 내 한 간, 달 한 간, 맑은 바람(청풍)에 또 한 간을 맡겨두는.... 나는 이 시조를 통해 송 순의 독락의 향기에 젖는다.

 

여행, 최고의 꾼(?)은 혼자 다닌다. 차 마시는 것도 혼자 마시는 것을 으뜸으로 친다. 즐거움에도 혼자 즐기는 獨樂의 경지가 으뜸이다. 둘일 때는 너를 만나지마는 혼자일 때는 나를 만난다. 나 자신과의 만남은 내 영혼을 들여다 보는 관조의 시간, 속으로 속으로 가라앉는 沈潛의 시간이다. 마음의 뜰을 말갛게 비질하는 그 시간의 충만함은 최고의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가나와 함께라면 고독마저도 감미롭다’던 카피가 소녀들의 가슴에 커다란 동심원을 그리면서 우리나라 초코렛 시장의 지도를 바꾸어 놓았던 시절이 있었다. 스낵이 친구들과 함께 먹는 과자인데 비해 쵸코렛은 늦은 밤 혼자 먹는 여고생 독락의 과자였던 것이다.

 

소한재에서 내가 가장 아끼는 물건은 다실 벽에 걸려있는 소박한 현판이다. 秋史의 멋들어진 글씨로 友鶴山人書室 여섯 자를 새긴 것이다. 먼 훗날 청량산 자락으로 돌아갈 때 저 현판 하나만 안고 돌아가려고 한다. ‘학을 벗 삼아 사는 산사람의 글(책) 읽는 집’ 鶴이 벗인 삶. 바람과 햇살이, 산과 물이 벗인 삶 그것이 진정한 독락의 경지가 아니겠는가? (현판을 가만히 들여다 보던 친구가 “우학선서실이기도 하네” 그런다. 山人을 붙여서 돌아앉으면 신선 仙자가 아닌가? 그의 혜안이 놀랍다.)

 

笑閑齋는 심심한 집이다. 李白의 시, 山中問答 가운데 笑而不答心自閑에서 웃을 笑자와 한가할 閑자를 따와 지은 이름이다. ‘말없이 빙그레 웃으면 마음이 저절로 한가로와 지는 집’이고 싶다는 나의 희망을 담았다. “......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렇 듯 이름은 그 사물의 성격을 규정한다. 이름을 그렇게 지어서 그런지 소한재는 정말 너무나 한가하고 심심한 집이다. 일 주일에 하루 정도 나 혼자 가서 하루 종일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돌아오는 맹물에 삶은 조약돌 같은 집이다. 그 빈 집에서 혼자 隱逸하노라면 세상으로부터 잊혀져 버린 것 같은 처연한 심사를 어쩔 수가 없다. 기인 이야기가 있는 집이고 싶은데 소한재에는 그저 텅 비인 시간과 공간만이 존재할 뿐이다. 오가는 철학적 담론도 없고 깊이 사색하는 영혼의 울림도 없다.

 

이 궁벽한 시골마을로 나를 찾아올 사람도 없지마는 그 심심함 때문에 나는 늘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이 된다. ‘가만이 오는 비가 낙수 져서 소리하니 / 오마지 않는 이가 일도 없이 기다려져 / 열릴 듯 닫힌 문으로 눈이 자주 가더라’ 육당 최 남선의 시조 <혼자 앉아서> 그대로다.

 

쵸코렛을 씹고 있어도 나는 고독이 감미롭지 않다. 입이 달콤한 그 순간에도 가슴은 늘 씁쓸하다. 지고의 즐거움이라는 독락의 즐거움도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심심함과 한가로움은 얼마나 다른 것일까? 생산적 외로움이 한가로움이라면 소비적 외로움이 심심함이나 무료함이 아닐까? 나의 머리는 한가로움을 쫓는 데 나의 몸은 언제나 무료하다.

 

소한재 대청 마루에는 종이 하나 매달려있다. 친구들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초인종’이라고 부르는 우리 집 초인종이다. 어느 시골 마을 공소에 걸려서 사람들의 영혼을 울리던 종인데 지금은 긴 사연을 안고 소한재 마루에 걸려있다. 초인종이란 이름 그대로 사람(주인)을 부르는 종이다. 그러나 이 종이 울리는 법이 거이 없다. 찾아오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울리지 않는 것은 종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늘 그 종에게 미안하다. 마리 로랑생은 ‘버림 받은 여자’ 보다 더 불행한 여자는 ‘잊혀진 여자’라고 했다는데... 누가 나의 초인종을 울려다오. 그러면 임을 기다리는 여인처럼 버선발로 뛰어나가 맞으리라.

 

심심헌(尋心軒)이라고 이름을 바꿔 볼까? 소한재는 가을빛에 젖어있고 나는 아직도 笑閑하지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