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잔의 단상

차이의 철학 차이의 미학

소한재 2014. 7. 16. 06:59

차이의 철학 차이의 미학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다름이지 누가 더 나은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후앙 미로와 피카소는 서로 다른 것이지 누가 더 잘하는 게 아니지요. 다른 것을 맛보는 것이 예술이지 일등을 매기는 것이 예술이 아닌 겁니다. -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

 

 

☆창의적 세계는 다른 세계다. 다르게 생각하라.

 한 여인의 아이가 죽었다. 기가 막히는 죽음이었다. 그 여인은 우리나라의 기지촌 여자였다. 흑인 병사와 결혼했고 그 사이에서 흑인 아이가 태어났다. 미국으로 돌아갔다. 정해진 시나리오 처럼 그 여인과 아이는 미국에서 버려졌다. 여인은 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밤에 출근하는 여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 시간에 아이를 맡아줄 탁아소는 없다. 설령 있다고 해도 거기에 아이를 맡길 돈이 없다. 여인은 허름한 여인숙에 방 하나를 얻어 장기 투숙하고 있었다. 방에 아이와 먹을거리를 남기고 밖에서 방문을 잠글 수 밖에 없었다. 아이는 울다가 지쳐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돌아온 여인이 방문을 열어보고는 그 자리에서 까무라졌다. 아이가 죽은 것이다. 그 날 밤, 그 방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 지는 불문가지였다. 서랍장이 앞으로 꼬꾸라져 있었고 그 위에 있던 대형 텔레비전이 방바닥에 나뒹굴어져 있었다. 아이의 머리는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어렵게 정신을 차린 여인이 방안을 수습했다. 아이를 안아 침대에 눕혔다. 서랍장도 일으켜 세우고 깨진 티비도 제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금방 백인 경찰관이 현장에 도착했다. 그 때 여인은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방바닥을 내리치면서 울부짖고 있었다. "내가 이 아이를 죽였다."("I kill him, I kill him, I kill him......") 경찰관의 눈에도 사건은 명백했다. 여인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경찰서로 데리고 갔다. 검사의 눈에도 판사의 눈에도 사건은 명백했다.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유아존속살해혐의로 여인은 16년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1심 재판이 끝나고서야 이 사건이 교민 사회에 알려졌다. 급기야 이 사건은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국내에도 알려졌다. 서로 다른 문화가 충돌하면서 빚어진 어처구니 없는 사태였지마는 사태는 심각했다. 자기 생존의 유일한 이유였던 아들이 죽은 것도 기가 막힐 노릇인데 엄마가 그 아이를 죽인 살인범이라니. 한국인들이 그 여인이 절대로 아이를 죽이지 않았다고 믿는 것과 똑같이 미국 사람들은 그 여자가 절대로 그 아들을 죽였다고 확신한다.

 

  에드워드 홀(Edward Hall)은 문화에 따라서 커뮤니이케이션이 어떻게 달라지는 지를 연구했다. 그 결과 그는 고상황적(high context) 커뮤니케이션과 저상황적(low context) 커뮤니케이션으로 나누었다. 저상황적 의사소통이 말이나 글 같은 텍스트(text)에 의해 의미가 결정되는 데 반해 고상황적 의사소통은 상황, 맥락(context)에 의해 의미가 결정된다.

 

  여인이 아이를 죽여야할 정황 증거는 차고 넘쳤다. 더구나 여인은 사건 직후 현장에서 “내가 이 아이를 죽였다.” (I Kill Him)고 자백을 했다. 그것도 반복적으로. 이 보다 더 확실하고 명백한 증거가 어디에 있겠는가? 여자가 그렇게 말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한국인들은 아무도 여자가 아이를 죽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은 말 자체 보다 어떤 상황에서 그 말을 했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 상황에서 그 여인의 ‘내가 이 아이를 죽였다’는 말은 ‘내가 직접적으로 이 아이를 살해했다’는 뜻이 아니라 ‘나의 가난이 그리고 나의 부주의가 아이를 죽게 했다’는 뜻이다.

 

  기호학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다른 것들로 가득 차있다. 피부색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제품도 다르고 인종도 다르고 마케팅 환경도 다르고.... 다르고 다르다. 기호학은 의미의 과학이다. 계열체와 통합체는 그 의미를 위한 씨줄과 날줄이다. 그 씨줄과 날줄이 교직되면서 의미를 나타내게 된다.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차이를 바탕으로 선택되고 배열되어야 한다. 기호학에서의 의미란 차이를 말한다. 여자의 의미는 여자 속에는 없다.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듯이 여자의 의미는 여자 속에 없다. 남자와의 차이, 그것이 바로 여자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올 때도 혼자 왔듯이 저 세상으로 갈 때도 혼자 간다. 인간은 그 만큼 개성적인 존재라는 말일 것이다. 일심동체라는 부부도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 까지다. 혼자 왔지만 인간은 혼자 살지는 못한다. 다른 사람과 어울려서 살아가게 만들어진 존재인 것이다. 한자 사람 人 자는 두 사람이 서로 어깨를 기대고 있는 모양을 그린 상형문자라고 한다. 서로 어울려서 회사도 만들고 사회도 만들면서 그렇게 살다가는 갈 때는 또 그렇게 혼자 가는 것이다. 나의 존재 의미는 나다움에 있다. 남이 아닌 나 다움에 나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나 다움이란 남과의 차이가 바로 나 다움이 아닐까?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독락당 계류에 觀魚臺라 이름 붙인 바위가 있다. 충북 영동에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에도, 충북 괴산군 괴산읍 제월리에도, 안동시 도산면 단천동에도 관어대가 있다. 관어는 <장자> 추수 편에 나오는 장자와 혜자 사이의 대화에서 비롯되었다. 장자가 자신을 질시하는 혜자와 다리 위를 거닐면서 물 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를 보았다. 장자가 ‘어락(魚樂)’이라고 말하니 혜자는 “자네가 물고기가 아닌데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 수 있는가?”라고 비아냥 거렸다. 이에 장자가 답하기를 “자네는 내가 아닌데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른다 하는가?”라고 일침을 놓았다. 물고기의 자유로운 군집유영을 안분지족, 무애, 또는 원천적인 즐거움의 상징으로 여겨 관어는 선비의 즐거움이 되었다. 내가 너가 아니 듯이 너가 내가 아니며 내가 고기가 아니 듯 고기 또한 너가 아니다.

 

 

☆그러나 다름에 인색한 우리 문화, 모난 돌이 정 맞는 사회.

 서양인들은 ‘너만의 개성을 가져라’고 가르치는데 우리는 ‘튀지 마라.’고 가르친다. ‘모난 돌이 정 맞는’ 사회니 남자가 여자 보다 긴 머리를 한다든지 처녀가 죄수나 비구니 스님들처럼 머리를 빡빡 밀고 다니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도전이다. 경찰관이 자와 가위를 들고 장발의 청년과 미니 스커트를 입은 처녀들을 거리에서 단속하지 않았던가? 총장이 가위를 들고 대학 정문을 지키는 웃지 못할 코메디가 현실이었던 적도 있지 않았던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기인을 용서하지 않는 사회는 결코 건강할 수 없다. 이스라엘 의회에서 만장일치는 부결이라는데 만장일치를 지고의 선으로 배워온 우리로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창의적이기 위해서는 일단은 달라야 하는데 그 다르다는 것에 너무나 인색하다. 유치원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선으로 그려진 고양이나 코끼리 그림 속을 크레용으로 색깔 칠하기부터 배운다. 선 밖으로 나와서도 안 되지만 코끼리를 빨간 색으로 칠하면 더욱 안 된다. 아이들의 상상 속에 빨간 색 코끼리 한 마리쯤 있으면 뭐 그리 큰일 날 일도 없지 않는가? 그런 엉뚱한 생각이 창의성의 씨앗이고 출발점인데... 식당에 갔을 때도 우리는 걸핏하면 ‘(짜장면, 냉면) 통일’이기 십상이다. 모두가 식성이 다르고 취향이 다른데... 심지어는 ‘따로따로 시키면 늦게 나와요’라는 종업원의 은근한 협박을 듣기도 한다.

 

  사자와 소가 결혼을 했다. 사자는 소를 너무 사랑해서 항상 싱싱한 고기를 잡아다가 주었고 소는 사자를 너무 사랑해서 항상 싱싱한 풀을 뜯어다 주었다. 그런데 사자는 소가 나를 사랑한다면서 왜 풀을 가져다주지? 소도 마찬가지로 사자가 가져다주는 고기를 먹지 못하고 왜 나를 사랑하지 않지? 결국 그래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게 단순한 우화이기만 할까? 이런 일은 우리들에게도 너무나 많이 일어나고 있다. 부부는 서로 다른 이들이 만나 서로 다름의 의미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조화냐 갈등이냐의 갈림길에 서게 될것이다. <금성에서 온 남자 화성에서 온 여자>라는 제목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다. 한 마디로 남자와 여자는 서로 다른 인류여서 서로가 이해할 수 없는 외계인이라는 것이다.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가 의사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화성어를 배우고 금성 언어를 배우는 수 밖에 없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차이는 인정해도 차별하지는 말자. 차이는 차별과 다른 말이다. 다름은 틀림과 동의어가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다름이 곧 틀림으로 통한다. 공자는 논어에서 "군자는 화이부동하고 소인은 동이불화한다"(君子 和而不同, 小人 同而不和)하였다. 같지는 않으나 조화로운 상태가 화의부동이다. 군자의 화이부동이란 남과 차이를 갖되 같아지려 하지 않는 것이다. 반면 소인은 무조건 남과 같아지려 하는 것이다 하였다.

 

  사람들에게 ‘+’ 가 그려진 카드를 보여주면 수학자는 덧셈이라고 하고, 산부인과 의사는 배꼽이라고 한다. 목사는 십자가라고 하고, 교통 경찰은 사거리라고, 간호사는 적십자라고, 약사는 녹십자라고 대답할 것이다. 모두 다 자기 입장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틀린 것이 아니고, 다를 뿐이다. 그래서 사람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늘 이해의 대상이다.

 

  광고에서도 늘 차별화를 말한다. 차별화 되지 않는 브랜드는 달밤에 비단 옷을 입은 것 만큼이나 어리석다고 데이비브 오길비는 말한다. 그러나 광고나 브랜드의 차별화는 단순히 다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저 다른 것이 아니라 더 낫게 다른 것이어야 한다. Difference는 창의성의 필요조건이다. 그러나 Better는 창의성의 필요충분조건이다.

 

  레오버넷은 차별화를 위한 차별화의 어리석음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차별화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면 내일 아침 양말을 입에 물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보라. ” 아마 하루 아침에 유명인사가 되어있을 것이다. 졸지에 유명해지기는 하겠지만... 돌아이(?)로 유명해지지 않겠는가? 누가 돌아이(?)로 유명해지고 싶겠는가?

 

  지금은 다양성의 시대다. 창의적 세계는 다른 세계다. 스티브 잡스의 애플사 광고는 파블로 피카소의 흑백 사진에 Think Different가 전부다. 그 스티브와 그리고 애플의 다른 생각이 현대인들의 생활 자체를 바꿔 놓았다. 이제 그는 죽었지만 창의적 CEO의 아이콘이 되었다. 지금은 No. one(1)의 시대가 아니다. only one(1)의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