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유람학교를 꿈꾸며

한국전통정원 답사를 떠나면서

소한재 2020. 7. 2.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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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원 전문가가 한국에 왔다. 한국의 정원 전문가가 안내를 했다. 궁중 정원의 대표라 할 창덕궁 후원을 걸었다. 돈화문 앞에 나왔을 때 일본인이 물었다. “정원은 어디 있스무니까?” 

 

십 년을 경영하여 초가 삼간 지어내니

나 한 간 달 한 간 청풍 한 간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초가, , 바람, 그리고 강과 산... 어디에도 정원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 면앙정의 시조와 웃지 못할 이 일화는 한국 (전통) 정원이 어떤 정원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정원에서도 한국과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의 정원 문화는 가히 세계적이다. 그런데 비해 한국은 정원 문화가 발달하지 못했다.’ 더 심하면 한국에는 정원이 없다는 어처구니 없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코 앞에 두고도 왜 일본인은 정원을 보지 못했을까?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산과 강, 계곡, 나무와 숲, 바위와 물, 바람... 그리고 숨은 듯 깃들어 앉은 작은 정자 몇 개가 전부다. 거기에는 기화요초가 가득한 화단이 없다.두부모나 알사탕 같이 반듯하게 깍은 나무도 없다. 화려한 분수는 더더욱 없다. 없기도 하거니와 한국 정원은 눈으로는 그 아름다움을 다 볼 수 없는 정원이기 때문이다.

 

허준의 스승 유 의태는 말한다. 환자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는 心醫가 되라고. 우리 정원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서는 육안에다 가슴으로 읽어내는 心眼, 마음의 눈이 필요하다.

 

2

문인화는 寫眞이다. 思無邪의 그림이다. 선비들의 그림인 남종문인화는 文字香 書卷氣를 그린다. 이렇듯 한국화는 사물의 생김새를 그리는 寫形의 그림이 아니다. 뜻을 그리는 寫意의 그림이다. 그러기에 서양화의 눈으로 보면 뎃상의 기본이 안된 <歲寒圖>는 값을 매길 수 없는 명품일 수 있는 것이다. 먹으로만 그린 수묵화가 도화서 화공들의 화려한 채색화 보다 더 비쌀 수 있는 것이다. 동양화나 한국화에서는 붓으로 그린 부분 보다 붓 한 번 지나가지 않은 여백의 공간. 그 순백의 텅 빈 공간이 꽉 찬 그린 공간 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닌다. 한국 정원에서 정자와 같은 인공적인 부분이 붓질이라면 산과 강, 계곡 같은 자연은 배경이 되는 여백이다. 비어있지만 꽉 찬 공간. 그 역설적 공간이 한국 정원 미학의 절정이다.

 

정원을 보면 그 사람이 자연을 어떻게 생각했는가? 즉 그의 자연관을 알 수 있다. 산과 강, 바람. 안개.. ... 이런 것이야 미국이라고 한국이라고 무엇이 다르겠는가. 물리적 자연이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그러나 그 자연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지역마다.. 자연에 대한 생각은 다르다.

 

서양화의 눈으로 동양화(한국화)를 보면 그 아름다움을 볼 수도 느낄 수 도 없듯이 서양 정원의 눈으로 한국의 전통 정원을 보면 그 아름다움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

 

한국 정원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서는 뛰어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대나무 대롱을 타고 와서 다산초당 지당으로 떨어지는 폭포수는 개미 오줌 누는 것 같이 졸졸 내지 쪼르륵 수준이지만 이백의 망여산폭포나 비류직하삼천척의 수준으로 보고 들어야 한다. 석가산 위에 올려져 있는 작은 돌덩이를 보면서 신선이 산다는 바다 가운데 아스라이 떠있는 환상의 섬, 봉래, 영주, 방장의 삼신산을 보아야 한다.

 

한국 정원은 눈으로 보는 정원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정원이다. 음식을 눈으로 맛 볼 수 없듯이 한국 정원은 눈으로 봐서 그 아름다움이 다 보이는 정원이 아니다. 가슴이나 마음으로 보아야 비로소 그 아름다움이 보이는 정원이다.

 

3

우리 정원 답사는 어렵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정원은 서양 정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정원은 서양 정원과는 많이 다른 정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정원을 만들었던 주인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보고있는 정원은 주인이 만들고 즐겼던 그 정원이 아니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바뀌어 버린 것도 있고 원형과는 다르게 복원된 것도 있고...

 

가령 다산초당이 대표적 예이다. 다산이 머물던 다산초당은 이름 그대로 띠집이었지만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다산와당이 아닌가? 다산이 살았던 그 당시 화계에는 30여종의 꽃나무와 풀이 심어져 있었다. 그것도 20여종은 중국과 인도에서 들어온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외래수종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명화가훼로 가득했던 그 화려한 화게를 볼 수가 없다.

 

4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처럼 절에 가면 부처님의 눈으로 봐야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듯이 한국의 전통 정원은 손님이나 구경군의 시선이 아니라 그 정원을 만들었던 주인의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 유람을 즐겼던 선비들이지만 그 너른 산천을 모두 답사를 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들은 臥遊를 즐겼다. 누워서 그림을 보면서 산수간에 홀로 나앉았다. 그 연장선에서 정원을 만들었다. 누워서 산천을 감상하는 와유의 현장이 바로 정원이었던 것이다.

 

한국 정원은 넓다. 결코 카메라 렌즈에 한꺼번에 담기지 않는 풍경이다. 내원과 외원으로 연결되어 있는 정원인데 우리가 생각하는 정원은 보통 내원이 전부다. 부분과 전체도 마찬가지다.

전체를 이해하지 않으면 세부도 이해할 수 없는 정원이다.

 

한국 정원은 자연과 인간이 둘이 아닌 자연합일의 현장이고 추상적으로 생각되던 도()와 공()의 구체적 현시다. 정원은 흔히 풍류의 장소라고 말하는데 풍류는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의 정신적인 교감을 추구하는 것이다.

 

정원 답사는 관광객이 되어서는 안된다. 서양의 관광객처럼 볼 것을 찾는 게 아니라 우리는 풍류를 찾아야 한다. 카메라는 접어두고 온몸으로 느끼며 체험 속에 기억하는 것. 한국 정원은 그렇게 감상해야 한다.

 

정원을 느린 걸음으로 걸으면서 느껴봐야 우리 정원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느낄 수 있다. 인문학적 풍경 속으로 느린 산책, 그것이 정원 답사의 요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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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글, <분수와 폭포>는 동양인과 서양인에게 자연은 어떻게 다른 의미를 갖는지를 잘 보여준다.

 

분수와 폭포

 

동양인은 폭포를 사랑한다. 비류 직하 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이란 상투어가 있듯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그 물 줄기를 사랑한다. 으레 폭포수 밑 깊은 못 속에는 용이 살며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한다. 폭포수에는 동양인의 마음 속에 흐르는 원시적인 환각의 무지개가 서려 있다.

 

서구인들은 분수를 사랑한다. 지하로부터 하늘을 향해 힘차게 뻗어 오르는 분수, 로마에 가든 파리에 가든 런던에 가든, 어느 도시에나 분수의 물줄기를 볼 수 있다. 분수에는 으레 조각이 있고 그 곁에는 콩코르드와 같은 시원한 광장이 있다. 그 광장에는 비둘기떼가 날고 젊은 애인들의 속삭임이 있다. 분수에는 서양인의 마음 속에 흐르는 원초적인 꿈의 무지개가 서려 있다.

 

폭포수와 분수는 동양과 서양의 각기 다른 두 문화의 원천이 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대체 그것은 어떻게 다른가를 보자. 무엇보다도 폭포수는 자연이 만든 물줄기이며, 분수는 인공적인 힘으로 만든 물줄기이다. 그래서 폭포수는 심산 유곡에 들어가야 볼 수 있고, 거꾸로 분수는 도시의 가장 번화한 곳에 가야 구경할 수가 있다. 하나는 숨어 있고, 하나는 겉으로 드러나 있다. 폭포수는 자연의 물이요, 분수는 도시의 물, 문명의 물인 것이다.

 

장소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물줄기가 정반대이다. 폭포수도 분수도 그 물줄기는 시원하다. 힘차고 우렁차다.소리도 그러고 물보라도 그렇다. 그러나 가만히 관찰해 보자. 폭포수의 물줄기는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낙하한다. 만유 인력, 그 중력의 거대한 자연의 힘 그대로 폭포수는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물이다.

 

물의 본성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것이다. 하늘에서 빗방울이 대지를 향해 떨어지는 것과 같다. 아주 작은 또랑물이나 도도히 흐르는 강물이나 모든 물의 그 움직임에는 다를 것이 없다. 폭포수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거센 폭포라 해도 높은 데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 떨어지는 중력에의 순응이다. 폭포수는 우리에게 물의 천성을 최대한으로 표현해 준다.

 

그러나 분수는 그렇지가 않다. 서구의 도시에서 볼 수 있는 분수는 대개가 다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분수들이다. 화산이 불을 뿜듯이, 혹은 로켓이 치솟아 오르듯이, 땅에서 하늘로 뻗쳐 올라가는 힘이다. 분수는 대지의 중력을 거슬러 역류하는 물이다. 자연의 질서를 거역하고 부정하며 제 스스로의 힘으로 중력과 투쟁하는 운동이다. 물의 본성에 도전하는 물줄기이다.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천연의 성질, 그 물의 운명에 거역하여 그것은 하늘을 향해서 주먹질을 하듯이 솟구친다. 가장 물답지 않은 물, 가장 부자연스러운 물의 운동이다.

 

그들은 왜 분수를 좋아했는가? 어째서 비처럼 낙하하고 강물처럼 흘러내리는 그 물의 표정과 정반대의 분출하는 그 물줄기를 생각해 냈는가? 같은 힘이라도 폭포가 자연 그대로의 힘이라면 분수는 거역하는 힘, 인위적인 힘의 산물이다. 여기에 바로 운영에 대한, 인간에 대한, 자연에 대한 동양인과 서양인의 두 가지 다른 태도가 생겨난다.

 

그들이 말하는 창조의 힘이란 것도, 문명의 질서란 것도, 그리고 사회의 움직임이란 것도 실은 저 광장에서 내뿜고 있는 분수의 운동과도 같은 것이다. 중력을 거부하는 힘의 동력, 인위적인 그 동력이 끊어지면 분수의 운동은 곧 멈추고 만다. 끝없이 끝없이 인위적인 힘, 모터와 같은 그 힘을 주었을 때만이 분수는 하늘을 향해 용솟음칠 수 있다. 이 긴장, 이 지속, 이것이 서양의 역사와 그 인간 생활을 지배해 온 힘이다.(이 어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