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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자꽃 설화(박 규리)詩人의 마을 2007. 1. 19. 09:24
「치자꽃 설화」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내고
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 눈가에
설운 눈물방울 쓸쓸히 피는 것을
종탑 뒤에 몰래 숨어 보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법당 문 하나만 열어놓고
기도하는 소리가 빗물에 우는 듯 들렸습니다
밀어내던 가슴은 못이 되어 오히려
제 가슴을 아프게 뚫는 것인지
목탁소리만 저 홀로 바닥에 뒹굴다
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여자는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더니
오늘따라 가랑비 엷게 듣는 소리와
짝을 찾는 쑥꾹새 울음소리 가득한 산길을
휘청이며 떠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며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 것 같았습니다
한번도 그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
한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가난한 줄도 알 것 같았습니다
떠난 사람보다 더 섧게만 보이는 잿빛 등도
저물도록 독경소리 그치지 않는 산중도 그만 싫어
나는 괜시리 내가 버림받은 여자가 되어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에 하염없이 앉았습니다
(박규리)
[해설]
▷ 사랑, 그 아픔과 고통의 뒤안길에서 ◁
누구의 가슴을 두드리는 소리인지 고즈넉한 산사(山寺)에는 비가 내리고, 맑고 투명한 목탁소리만 가늘게 울려 퍼진다. 때를 맞추어 치자꽃은 하얗게 피어 진한 향기를 뿜어내고, 한 여자가 산사를 등진 채 휘청거리며 산길을 내려가고 있다.
사랑에는 피치 못할 이별이 자리하고 있어서 더욱 아름답고, 그 아름다움만큼이나 애절한 것일까. 화자는 어느 날 산사의 종탑 뒤에 숨어서 뜻밖의 장면을 목도(目睹)하게 된다.
틀림없이 뜨겁게 사랑했을 두 사람, 그러나 이제는 사랑할 수 없는 위치에 서 있는 한 남자와, 사랑을 포기할 수 없는 한 여자의 밀고 당기는 몸부림이 전개되고 있다. 남자는 결국 여자를 달래 돌려보내고, 돌아서서 돌계단을 오른다. 이생의 모든 인연을 뒤로하고, 구도(求道)의 일념(一念)만으로 돌계단을 오르는 한 남자, 그가 바로 스님이다. 그러나 그도 칠정(七情)을 안고 살아가는 인간인지라 자신도 모르게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는 없다. 이를 악물어가며 슬픔과 미련을 의도적으로 안으로 삼켜보려 하지만, 종탑 뒤에 숨어서 지켜보는 다른 한 여인의 눈을 속일 수는 없는 모양이다.
화자의 시선은 아픈 이별 이후의 장면을 주시(注視)하며 두 사람의 감정을 따라간다. 그리하여 화자의 앵글은 도(道)를 향해 정진(精進)해 나가는 스님의 눈가에 고정되고, 급기야 그 눈가에 맺힌 눈물방울을 발견한다. 그리고 설움과 쓸쓸함으로 가득한 스님의 감정까지 예리하게 읽어낸다.
계속해서 화자는 스님의 행동에 주목한다. 돌계단을 올라 법당에 들어간 스님은 문을 닫지도 않은 채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念佛)을 한다. 아무도 없는 법당에 홀로 앉아 있는 스님의 모습은 이별 이후의 외로움과 설움을 보여주는 구도(構圖)이며, 문을 하나만 열어두고 기도하는 모습은 스님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아직도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이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구도(構圖)라 할 수 있다. 그 이별의 장면을 목격했던 화자의 감정도 어느새 그들의 감정에 이입(移入)되기 시작하여 화자의 귀에는 법당에서 들려오는 기도소리가 빗물에 우는 것처럼 들려온다.
구도의 길에 들어선 자신의 대의(大義)를 위해 사랑하는 사람마저 떠나보내야 하는 스님의 가슴에는 오히려 깊은 상처가 남게 되고, 그로 인하여 스님은 제 가슴을 스스로 아프게 뚫고 있는 것이라고 화자는 생각한 것이다.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몸부림치는 스님의 내적인 투쟁으로 인하여 목탁소리마저도 끊어질 듯 다시 이어지고 마음의 갈피를 쉽사리 잡지 못하고 있음을 화자는 예리한 시각(視覺)과 상상력으로 세밀하게 포착해 내고 있다.
이제 화자의 시선은 여자에게도 이동한다. 여자는 스님이 돌아 올라가는 돌계단 아래에 주저앉는다. 따라서 이별의 자리였던 돌계단이 스님에게는 구도를 위한 상승(上昇)의 자리인 동시에 아픔의 공간이라면, 여자에게는 하강(下降)의 공간인 동시에 고통의 자리라고 할 수 있다. 스님은 이별의 고통을 다스리기 위해 재빨리 그 자리(돌계단)를 피해 법당으로 들어가지만, 여자는 그 자리에 남아 한동안 상념(想念)에 젖는다. 여자가 앉아있었던 돌계단 아래에는 마침 치자꽃이 피어 진한 향기를 뿜어 올리고 있다. 진한 향기를 다하게 되면 이내 시들어 땅에 떨어져야만 하는 꽃잎의 운명, 그러나 그 운명이 다할 때가지 영원히 아름다움으로 남아 있으려는 차자꽃의 꽃말처럼, 그 여자도 이별의 슬픔을 안고서라도 그 자리에 한동안 아름답게 남아 있고 싶었던 것일까.
치자꽃의 진한 향기를 시샘하듯 가랑비가 내려 이별의 쓸쓸함을 더해준다. 그러나 그러한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아있던 여자가 일어선다. 그리고 마음의 정리가 끝나기라도 했다는 듯 산길을 내려간다. 가랑비는 여전히 내리고, 여자의 마음을 알아주려는 듯 쑥꾹새도 짝을 찾아 울음소리로 산길을 가득 매운다. 그러나 여자의 걸음은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16행에 이르러, 화자는 갑자기 객관적인 사실로 시선을 옮겨버린다. 자신에게서 점점 멀어져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면서 두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그것은 ① 사랑하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것과 ② 한번도 사랑한 적 없어서 한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 가장 가난하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일이 아무리 어렵다고 할지라도, 화자가 생각하기에는 적어도 사랑하고 사랑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것이다. 사랑하고 사랑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 이별로 인하여 상처가 아무리 크고 깊다고 할지라도, 사랑한 적도 없고, 그래서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만큼 가난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화자의 생각에도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데, 이전에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던 잿빛 등과 독경소리가 싫어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별의 장면을 경험한 이후, 화자의 감정은 사랑하는 사람을 뒤로하고 휘청거리며 산길을 내려가는 여자에게로 이입(移入)이 되어버린다. 이제 여자는 이별의 아픔을 잊어버리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잊어버리기 위해 산사에서 더 멀리 떠나가지만, 그럴수록 깊어지는 사랑의 감정은 막을 길이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사랑은 한없이 아리고, 역설적이게도 그 아픔 때문에 아름다운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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