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드봐쉠: 유대인들이 죽음을 기억하는 방식

 

사람은 모두 사라진다. 이 사실에서 벗어나는 이는 없다. 너나 나나 결국은 치우는 데도 돈이 드는 폐기물이 되어 화장장의 화로 속으로 들어간다. 그게 내일일 수도 있고 십 년 뒤일 수도 있다. 다만 그 시점을 모를 뿐이다.

 

그래서 질문은 이것이다.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무엇으로 남느냐다. 기억만이 진실이며, 기억이 곧 생명이다. 누군가가 기억하는 한 그는 죽지 않는다. 육신은 사라져도 기억 속에서 불려지는 이름은 다시 숨을 쉰다. 기억은 단순한 추모가 아니라 존재의 연장이다.

 

5.18은 왜 기억되어야 하는가, 4.3은 왜 사라지지 않는가. 이 질문은 과거를 향해 있지 않다. 지금의 우리를 묻고, 우리가 어떤 공동체로 남을지를 결정한다.

 

죽음에는 두 번이 있다. 몸이 멈출 때 한 번, 기억에서 지워질 때 한 번이다. 두 번째 죽음은 언제나 더 잔인하다. 전 정보사령관의 수첩에 적힌 '수거 대상자', '폐기처리자', '살생부'라는 말들은 섬뜩하지만, 본질적으로 폐기되지 않는 인간은 없다. 차이는 하나다. 잊히느냐?, 기억되느냐?.

 

유대인 홀로코스트 기념관인 '야드바솀'에서는 죽은 이들의 이름을 부른다. 이름을 부르는 순간 죽음은 완결되지 않는다. 기억은 살해보다 오래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말하고 쓴다. 기억을 남기기 위해서, 그리고 망각에 맞서기 위해서다. 이것이 바로 내가 글을 쓰는 이유다. 누군가에게 기억되기 위해서. 글은 장식이나 위로가 아니라, 지워지려는 것에 대한 '저항'이다.

 

한강 작가의 소설 한 편이 한 소년의 이름을, 한 도시의 진실을 세계의 기억 속으로 옮겨 놓았듯 문장은 죽음을 되돌린다. 이순신은 지금도 결단하고, 공자는 지금도 묻고, 소크라테스는 지금도 변론한다. 그들이 지금도 살아 있는 이유는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억만이 진실하다. 그리고 내 글이 남아 있는 한,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제목) 007, 나의 미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폐기 처리 비용으로 사천원을 달란다.

이거 내가 산 것도 아니다.

은행에 다니던 형님이 쓰던 거다.

007 검정색 서류 가방.

당시로서는 가격도 꽤 비쌌고 거의 모든 직장인의 로망이었다.

결혼하면서 집을 나올 때 형님이 쓰지 않던 그 가방을 가지고 왔다.

한동안 내가 잘 사용했다.

 

더 멋있는 가죽 서류 가방을 사고 나서는 전세 계약서나

중요한 서류를 넣어두는 보관 가방이 되었다.

돌리는 보안 장치도 달려 있어서 간이 금고 대용으로 썼다.

이사를 갈 때도 그 가방만은 짐칸에 싣지 않고 가슴에 꼭 껴안고 갔다.

하지만 여러 번의 이사를 거치며 그 가방은 점점 잊혀졌다.

더 이상 귀중품 보관 수단도 아니었다.

 

몇 년 전, 이 집으로 이사 오며 다시 발견되었다.

가방은 빛바랜 추억의 흔적일 뿐, 이제는 버려야 할 유산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옛날엔 귀한 물건이었는데

그 생각 하나 때문에 현관 구석에 오래도록 놓여 있었다.

마침내 오늘, 아내가 결단을 내렸다.

 

"이거 경비실에서 달라는대로 주고 버리고 와."

 

쓰레기장 옆에 가방을 모셔(?) 두고 오는 데 이름 모를 비애감이 들었다.

한 때 그렇게 빛났던 것들도 세월 앞에선 푸석푸석 해지더니...

이제는 버리는 데도 돈이 드는 쓰레기가 되는구나.

 

그런 운명은 가방만이 아니다.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나도 반짝이던 때가 있었다.

저 가방의 모서리가 닳아 가듯, 나의 젊음도 현장에서

하얗게 불태웠던 빛나던 시절이 있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브랜드들이 내 손끝에서 태어나고 사라지던

그 치열한 전장에서, 나는 저 가방과 함께 가장 뜨거운 중심에 서 있었다.

버리고 온 그 가방 위에 지금은 퇴물이 된 내 모습이 어른거렸다.

가방 위에 어른거리는 내 그림자를 털어내기라도 하는 듯

고개를 심하게 흔들고 돌아섰다.

 

"안녕, 나의 007."

 

너를 버린 게 아니라 너에게서 나를 구출해 가는 중이다.

나는 아직 일모도원(日暮途遠), 날은 저물었는데 갈 길이 머니...

 

사천 원에 팔아버린 것은 낡은 서류 가방 하나가 아니라,

나를 짓누르던 어제의 그림자였다.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소호헌 전경

退溪와 栗谷 사이에 소호헌(蘇湖軒) 이 있다

 

27번째 이야기. 소호헌

조선은 왕의 나라인가? 신하의 나라인가?

1392년 태조 이성계의 개국부터 1910년 순종까지 조선은 27명의 왕이 이어받아 519년간 존속했다. 그 오백년의 시간은 왕의 시간이었을까, 대신의 시간이었을까, 혹은 백성의 시대였을까?

여러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한마디로 말해서 조선은 왕의 나라도, 신하의 나라도 아니었다. 조선은 성리학의 기반 아래 완비된 과거제도 등에 의해 선발된 엘리트들이 관리하는 통치 체제가 구축된 나라였다. 왕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왕의 나라는 더더욱 아니었다. 영의정과 좌의정 우의정 등 삼정승과 육조판서의 '삼공육경'(三公六卿)이 있었지만 고위관리인 내, 외직의 임명과 파직은 이조(吏曹) 전랑(銓郞)의 권한이었다. 이조는 오늘날의 총무처 그리고 인사혁신처의 역할을 다 갖고 있었다.

왕도 신하도 독단적인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는 절묘한 상호 권력 견제장치였다. 어느 시대에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세력 간의 갈등은 있게 마련이었고 조선시대는 당파싸움, 즉 당쟁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파는 조선의 통치철학인 성리학의 해석을 둘러싼 견해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았다.

사진: 소호헌 현판, 소호헌에는 퇴계학파의 본향에 자리한 서인 약봉의 태실이 있다.

 

'서인과 동인' '남인과 북인', '노론과 소론' 그리고 '대북과 소북'으로 당파는 사안에 따라 분화돼나갔다.

당파싸움의 시작은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으로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사극에 자주 등장하는 한명회가 대표적인 훈구파의 거두라면 사림파는 훈구파에 의해 사화를 겪으면서도 살아남아 조정에 진출한 선비들이었다. 사림파는 서인과 동인으로 분화되고 대표적인 동인은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이었다. 즉 초야에 묻혀있던 선비들이 훈구파를 몰아내고 조정에 진출해서 사림파가 되었고 그들의 노선 차이가 다시 서인과 동인으로 갈라서게 한 것이다.

안동은 동인의 태두인 퇴계학파의 본산이었다. 조선에서 주자학을 최초로 완벽하게 이해하고 가르친 이가 퇴계였다. 퇴계는 인간의 존재를 이(理와) 기(氣)로 구분하고 '이기이원론'을 폈다. 여기에 고봉 기대승은 반론을 폈고 율곡은 고봉의 주장을 이어받았다. 그것이 '이기일원론'이었다. 조선의 당쟁은 이처럼 주자학을 해석하는 예송논쟁과 '이기'를 둘러싼 해석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퇴계는 동인과 서인으로 분화하기 전의 사림이었지만 스스로 당쟁의 주역인 적은 없었다. 그러나 퇴계의 제자들은 대부분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서인과 대립했고 그래서 조정에 나아가지 못했다. 그렇다고 사림파의 일원이었던 동인과 서인이 늘 적대적인 관계였던 것은 아니다.

심지어 율곡은 벼슬에서 물러나 계상(溪上)서당에 머물고 있던 퇴계를 만나기 위해 1558년 봄 안동에 찾아온 적도 있다. 58세의 퇴계와 약관 23세의 율곡의 세기적인 만남이었다.

계상서당

계상정거도

퇴계의 수제자가 학봉 김성일(1538~1593)이듯, 안동은 그때부터 퇴계학파의 중심이었고 주자학의 본향이 되었다.

<강아지똥>의 동화작가 권정생 샘의 향기가 묻어나는 안동 일직에는 기념비적인 공간 하나가 있다. 대구에서 의성을 지나 안동 경계에 들어서게 되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마을이 일직이다. 일직면 소재지에 도달하기 전, 소호리 국도변에 오래된 고택 한 채가 고즈넉하게 있다. '소호헌'(蘇湖軒)이다.

안동에서 '소호헌'은 국가가 지정한 보물 이상의 각별한 의미를 갖는 공간이다. '소호헌'은 퇴계 문하가 아닌 율곡 문하에서 공부하고 성장한 약봉 서성의 태실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퇴계학파의 본향에서 서인 계열의 소호헌이 홀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인식하던 사화를 밥 먹듯이 벌이는 적대적인 당쟁과는 거리가 먼 듯이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약봉 서성의 부친인 서해가 퇴계의 제자였다면, 어쩔 수 없이 어린 나이에 한양으로 올라가게 된 약봉이 율곡문하에서 공부함에 따라 서해, 서성 부자는 각각 퇴계와 율곡에게 사사받아 동인과 서인을 넘나들게 된 집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조선 사대부 건축의 정형화된 틀 속에서도 이 집은 丁자 모양으로 틀을 깨고, 주춧돌 위에 다시 평방(平枋)을 올리는 기묘한 건축적 실험을 감행했다

퇴계와 율곡 사이에 소호헌이 있다

약현성당

소호헌'(蘇湖軒)

소호헌은 조선전기 문신 서해(徐嶰 1537~1559)가 서재로 쓰던 별당이었다. 우리 독립운동의 산실인 임청각을 지은 고성 이씨 집안의 이명(李洺)이 자신의 다섯째 아들 이고(李股)가 결혼을 하게 되자 분가시키면서 지어준 집이었다. 그런데 대구 서 씨인 서해가 이고의 앞을 못보는 딸과 결혼하자, 선물로 이 소호헌을 내어준 것이다.

서해는 당대 안동 최고의 가문에 장가를 들었다. 대구 서씨 또한 서거정과 같은 가문으로 서해의 부친 서고(徐固)가 예조참의를 지내는 등 당당한 명문가였다.

안타깝게도 서해는 2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서해의 아내는 소호헌에서 태어난 어린 아들 서성(徐渻 1558~1631)을 데리고 한양으로 가서 술과 약과를 만들어 팔면서 아들을 공부시켰다. 이 소호헌 왼쪽 건물이 바로 약봉(藥峯) 서성의 태실이다.

약봉은 안동에서 태어났지만 한양으로 올라가 율곡문하에서 공부를 한 덕에 벼슬길에 올라 승승장구했다. 약봉은 경상, 강원, 황해, 평안, 함경, 경기 등 6도 관찰사와 도승지, 대사헌, 형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서성의 네 아들도 모두 입직해서 높은 벼슬에 올랐다. 첫째는 우의정에 올랐고 둘째는 종친부전첨, 셋쌔는 현감, 넷째는 선조의 사위가 됐다. 셋째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족을 거느리고 안동 소호헌으로 내려오기도 했다. 소호리 태생 서성이 서울로 올라가서 집안을 크게 일으킨 셈이다.

지금의 소호헌은 대구 서씨 종중 소유로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소호헌에 도착한 때는 노을이 지기 직전이었다. 오백년이 더 지난 고택이었지만 관리가 잘 된 덕분인지 지금도 누군가 문을 열고 나와서 낯선 손님을 맞이할 것 같았다. 소호헌 뒷뜰 목련은 봄 햇살을 받아 작열하듯 꽃을 피우고 있었다.

바야흐로 봄의 절정이었다. 그 옆 작은 정원에 '소호헌 보물 제 47호'라고 장난스럽게 장식을 해놓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소호헌 약봉 태실

 

소호헌은 앞면 3칸, 옆면 2칸이 대청이다. 앞면 1칸, 옆면 2칸은 누마루가 놓여있다. 누마루에 붙은 대청은 'ㄱ'자로 꺾였는데 앞면 2칸 옆면 1칸 크기의 온돌방이 붙어 'T'자 모양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이 소호헌의 지붕 모서리를 장식한 기와에는 용 두 마리가 새겨져 있는데 민가나 여염집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용 문양이다. 누마루의 숫막새에는 봉황문양이 있다. 용과 봉황을 새겨넣은 기와로 집을 짓는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최고의 사치를 부린 건축이라고 할 수도 있다.

사진: 소호헌 망와 기와의 용문양

그러나 만일 조선 후기에 일반 민가에서 용문양이 들어가 있는 기와를 사용해서 집을 지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면, 아마도 역모의 죄를 범하였다며 삼대가 멸문지화를 당했을 지도 모르는 위험천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 집을 지은 이고가 99칸짜리 임청각을 짓는 등 민간에서는 최고의 집을 지은 것과 마찬가지로 소호헌을 지으면서도 나름 최고의 집을 꾸민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당시로서도 왕실에서만 쓸 수 있는 용과 봉황 문양을 기와 문양으로 쓴 것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건축을 실제 담당한 대목수의 실수가 아니라면, 용 문양을 쓸 수 있는 큰 인물이 이 가문에서 나기를 기대하는 보다 큰 뜻이 담겨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유추해볼 수 있지만 근거는 없다.

'소호헌'에서 국도를 따라 6.5km정도 안동으로 가다가 낙동강의 지류인 미천이 구비도는 암산유원지 바로 옆에는 고산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고산서원은 퇴계학파의 대학자로 인정받으며 '소퇴계'로 불리는 대산 이상정이 강학한 서원이다. 퇴계학파의 고산서원과 율곡 이이에게 사사받은 약봉의 소호헌이 지척 간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조선당쟁의 격화라기 보다는 '탕평(蕩平)의 정치'가 이곳에서도 소박하게 이뤄진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서명수 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고산서원 전경

퇴계와 율곡

근처 들러볼만한 곳

고산서원 전경

무릉유원지

대산 이상정 종가

암산유원지

조탑동 오층전탑

조탑리 권정생 선생이 살던 집

 

인생도처유상수

인생도처유상수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첫째날 소요유

담양 관방제 숲길

죽록원 대밭길과 산수 원림(한국 정원) 

메타쉐콰이어 가로수길+메타 프로방스

 

둘째 날

진도 대교+진도 타워 관광

운림산방 수묵비엔날레 

(남도 잔성)

세방낙조

쏠비치 리조트 

 

셋째 날

신비의 바닷길+체험관

전 왕온묘

소전미술관 수묵비엔날레 

토요민속공연 

금골산+삼층석탑

용장성(용장사+전시관+배중손 장군 사당+용장성)

벽파진(벽파정+충무공전첩비)

진도대교 야경

 

넷째 날

보길도 고산 부용동 원림(낙서재+곡수당 일원, 동천석실 일원, 세연정+옥소대 원림)

우암 글씐 바위

예송리 상록수림과 자갈해변 소요유

통리 중리 해변 솔밭, 모래밭길

 

다섯째 날

땅끝 관광지(전망대+토말비+모노 레일, 데크길 산책)

달마산 미황사

두륜산 대둔(흥)사 

녹우당 고산 윤선도 유적지)

월출산 무위사

백운동 원림

월남사지와 월출산

송정역

 

--------------------------------------------------------------------------------------------

첫째날 – 담양 소요유

 

서울 형님이 내려왔다.
언제 봐도 반가운 얼굴이지만, 이번엔 조금 다르다.
도시의 먼지를 털고 산수유람학교 학생이 되겠다며
손에 지도를 쥐고 나타났다.
나보다 여섯 살 위지만, 오늘만큼은 내가 교장이고 형님은 학생이다.

 

관방제 숲길.
오래된 나무들이 물가를 지키며 서 있었다.
형님은 묻지도 않고 걸었다.
걷는 게 곧 말이 되는 시간이었다.
가을빛이 물 위에 눌러앉고, 우리는 그 속을 천천히 흘러갔다.

 

죽녹원 대밭길에선 바람이 먼저 인사를 했다.
대나무들이 부딪히며 내는 소리는
마치 오래된 형제의 대화 같았다.
"잘 지냈냐?"
"응, 그럭저럭."
형님은 그 소리를 듣더니 “이게 참 좋다” 하고는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산수 원림에 들어서니 돌과 물, 나무와 바람이
조용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정원이라기보다, 자연이 사람을 허락한 자리 같았다.
형님이 한참을 바라보다 말했다.
“사람 마음도 이렇게 가지런하면 좋을 텐데.”
나는 웃으며, “그게 바로 오늘의 수업이죠.” 했다.

 

메타세쿼이아 길로 나올 즈음,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로 길게 흘렀다.
그 길 끝에는 메타프로방스의 인공적 색들이 번쩍였지만,
이상하게도 그조차 싫지 않았다.
자연과 인공, 소요와 관광—
둘이 섞여 흐르는 이 묘한 온도 속에서
우리는 묵음 같은 오후를 건넜다.

 

 

 

 

대표사진 삭제
 

포천 금수정

대표사진 삭제

포천 금수정

대표사진 삭제

청원 백석정

대표사진 삭제

청원 백석정

대표사진 삭제

예천 삼수정

대표사진 삭제

예천 삼수정

대표사진 삭제

옥천 상춘정

대표사진 삭제

옥천 상춘정

대표사진 삭제

옥천 청풍정

대표사진 삭제

옥천 청풍정

대표사진 삭제

옥천 부소담악 추소정

대표사진 삭제

옥천 부소담악 추소정

대표사진 삭제

옥천 부소담악 추소정

 

 

'산수유람학교를 꿈꾸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자 기행  (0) 2022.02.14
亭子遺憾二題  (0) 2020.07.03
한국전통정원 답사를 떠나면서  (0) 2020.07.02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