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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여행길에서 만난 풍경(1)구름에 달 가듯이 2009. 9. 8. 23:08
부산 가는 길에 진주 교외에 있는 용호정원을 찾아간다. 보통은 별서 정원이라는게 개인 소유라 은밀한 곳에 숨어서 혼자 즐기는게 보통인데 이 정원은 동네 입구에 있으면서도 울도 담도 없어서 아무나 쉽게 들어갈 수 있다. 조성하기는 1922년에 만석지기 박 현경이 했으나 쓰기는 온 동네 사람들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개인 정원이라기 보다는 마을 공원 같은 곳이다.
연못 주변에 중국의 무산 십이봉을 인공으로 만들었고 못 가운데에는 용호정이 물 속에 다리를 담그고 서있다. 무산십이봉이 호면에 비쳐 일렁이면 용이 꿈틀 대는 것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 용호정이다.
일제 치하이던 1920년대 몇 해 동안 기근이 들어 수많은 사람들이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자 인근 최고의 부자였던 박 현경이 재물을 풀어 요즈음의 취로사업으로 이 정원과 동네 옆 산에는 죽은 아버지를 기리는 절(용산사)를 지었다. 말하자면 국가가 아닌 한 개인이 펼친 뉴딜 정책인 셈이다. 이 못 가에는 이 정원 주인에게 신세를 졌던 동네 사람들이.. 심지어는 이 집 사랑방 신세를 졌던 과객들이 돈을 모아 세운 송덕비가 일곱개나 서있다. 무엇이 아름답다 아름답다해도 사람의 마음 보다 아름다운게 있을까?
연꽃이 가득한 호수를 줄 배를 타고 들어가는 낭만도 멋지고 무산십이봉이 춤을 추는 정원도 아름답지마는 내 눈에는 소박한 그 일곱개의 송덕비가 이 정원에서 가장 아름다워 보였다. 누구였던가? 사람이 꽃 보다 아름답다고 노래한 이는?
양산 어곡리에 있다는 우규동 별서 정원을 찾아간다. 네이게이션에도 안나오길래 일단 어곡리를 찾아가면 쉽게 찾을 수 있겠거니... 정말 그 때는 몰랐다. 그게 얼마나 착각이었는지를. '등에 업은 애기 삼년 찾는다'더니 나야 말로 그 동네에 가서 한 시간을 넘게 찾아헤야했다. 열 사람도 넘게 동네 사람을 붙들고 물어보고, 여기 갔다가 저기 갔다가, 손에 든 답사 수첩에 찾아가는 길 안내를 몇 번을 다시 읽고... 양산시청에 문화관광과에 전화했더니 번호가 바뀌었다고 하고.. 관광안내센터에 전화했더니 "머라꼬예? 우규동 별서 정원이 머라예?" 도리어 내게 묻는다. 나는 어떡하라고. 그 멀리서 와서 보지 못하고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라는 우려가 고개를 들 무렵 기적적으로 우규동 별서를 발견했다. 이건 분명 탐험이었고 분명 발견이었다. <소한정우규동서식지>라고 바위에 새겨진 글씨는 거의 발굴 수준이었다. 소한정도 사라진지 오래 되었고 네모난 연못 가운데 둥근 섬이 있는 소위 방지원도의 세심당은 허물어져 그 원형을 짐작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황폐화되어 있었다. 거북이 모양의 돌이 호안에 세워져 있어서 마치 섬이 거북이 등을 타고 있는 것 같았다는데 그 돌도 찾을 수가 없었다. 조그만 정자 기왓골에는 잡초만 무성했다. 그래도 너럭바위를 씻으면서 흘러내리는 삼미천 계류와 푸른 대숲을 지나는 바람 소리는 여전해서 막바지 무더위가 저만큼 물러앉아 있었다. 아무도 없는 적막강산의 이 별서정원을 한 시간 동안 독락, 정말 온전하게 혼자 즐기는 호사를 부렸다. "워매, 좋은거..."
간절곶. 정동진 보다 5분 먼저 일출을 볼 수 있다는데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것인지 울산시의 뻥인지 내게 그걸 가릴 재주는 없다. 하얀 잇빨을 드러내고 소리 치는 동해의 파도가 도심에 찌든 생활의 먼지를 다 씻어간다. 동해를 건너온 태평양의 바람이 머리를 빗기는 한나절. 박 재상의 아내상이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선 그 간절곶에 서면 누구나 그리운 얼굴 그리운 이름 하나쯤은 떠올릴 수 있지 않으랴? 그(녀)를 위해 엽서를 쓰자. 그리고 세계에서 제일 큰 우체통에 넣어보자. 누구에게 만년필 꾹꾹 눌러 편지를 써본게 언제였던가? 정겹던 우체부 아저씨의 자건거 요령 소리는 빛 바랜 추억이 되어 버렸고 매일 같이 쌓이는 스펨 메일은 컴퓨터 켜는게 짜증스러울 정도가 되었으니... 발전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닥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이 바닷가에서 나도 청마의 벽을 생각한다. 그리움으로 멍이 들어 저 바닷물 빛 같이 시퍼런 내 마음을 그 누가 아리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한반도 최초의 통일 왕조를 이룩했던 신라 문무왕은 죽어서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동해 감포 앞바다에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그의 수중능이 있다. 대왕암이 멀리 보이는 감은사는 그의 아들 신문왕이 죽은 아버지를 위해 지은 절이며 대웅전 밑에는 동해의 용이 된 아버지가 드나들 수 있도록 공간을 두어 설계된 것으로 유명하다. 이곳 울산의 대왕암은 지아비의 뜻을 받든 문무왕비의 수중능으로 알려져 있지마는 과학적 근거는 별로 없다. 감포의 대왕암은 문무왕의 산골처, 수중능으로 밝혀져 사적 158호로 지정이 되었지마는 울산의 대왕암은 그저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전설일 뿐이다. 태양에 물들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고 하더니... 다만 그런 전설을 만들어낸 민초들의 마음이라는게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보게 된다.
문무왕비의 수중능이라면 대왕암이 아니라 대왕비암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나? 이름이야 어쨌던 왕비의 수중능이든 아니든 간에 대왕암은 빼어나게 아름다운 곳이다. 해금강을 뺨치는 해안 바위 풍경도 절경이지마는 대왕암 주변의 해송림은 그 자체만으로도 보물이다. 아름다운 두 개의 울기 등대는 순전히 덤이다.
운강 고택을 보러 청도 금천면 신지리를 찾아갔다가 굳게 잠긴 대문 앞에서 절망의 벽을 느끼면서 돌아서야 했다. 멀리서 온 것을 안타깝게 여긴 동네 아저씨가 관리하는 사람 집을 가르켜 주었는데 문만 활짝 열려있을 뿐 사람이 없었다. 마을회관엘 갔는데 거기에 관리하시는 분이 있긴 했으나 만취 상태로 코를 드르렁 드르렁 골면서 자고 있는지라 차마 깨울 수가 없었다. 동네 앞에 있는 선암서원엘 갔는데 거기도 거부하는 몸짓으로 대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담 너머로 사진 몇 장을 찍고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 했다. 선암서원은 서원 같지가 않고 양반집에 서당이 붙은 것 같은 특이한 구조였다. 서원 입구 문도 반가의 대문 같았으며 동재 서재에 해당되는 건물도 내외담을 사이에 두고 사랑채와 안채가 마주 보고 서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주변 경관이 어찌나 뛰어나던지.. 이렇게 아름다운 서원이 어떻게 이렇게 알려지지 않았나가 이상할 정도였다. 아름답기로만 친다면 병산서원과 덕동서원, 옥산서원 다음 서열에 이 곳 선암서원이 아닐까? 이건 순전히 나의 썰?(說)이다.
신지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임당리에는 김씨 고택이 있다. 김씨고택이라면 사람들이 잘 모르고 내시집이 어디냐고 물으면 금방 가르켜 준다. 실제로 궁중 내시로 정3품 통정대부에 까지 올랐던 김일준이 말년에 낙향하여 지은 집으로 임진왜란 전부터 400여년간 내시 가계가 이어져 온 내시 종가다. 흔히 내시는 결혼도 못하고 아이를 못 낳으니 대도 못 잇는 것으로 생각하지마는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권력의 최측근에 있었던 내시들은 상당한 권력과 부를 거머쥐고 있었고 그 돈과 권력으로 아내도 사고 양자도 들여서 꼬박 꼬박 대도 이었다.
대단한 규모를 자랑하는 이 집에서 보통의 반가와는 다른 점이 몇 가지 눈에 띄었는데 여인들의 공간인 안채가 북향으로 앉은 점 그리고 그 안채와 안마당이 건물과 담으로 완전히 봉쇄되어 있다는 점이 특이했다. 하지만 이 집에서 가장 내 눈길을 끄는 것은 사랑채의 위치와 구조였다. 대문을 들어서면 안채로 들어가기 위해 중문을 지나야 하는데 사랑채의 한 칸이 중문이었다. 내외담을 한 중문쪽 판장벽에는 감시를 위한 세 개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사랑방도 두 칸은 앞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나머지 한 칸은 안채를 향해 문과 마루가 나있었다. 안채에서 누가 밖으로 나가고 밖에서 어떤 외간 남자가 안채로 들었는지를 일일히 감시할 수 있는 구조였다. 성적 불구인 내시들이 실제로 아내를 심하게 감시했다고 하는데 이 집의 구조에서 쉽게 그런 저간의 사정이 뻔하게 읽혀지고 있었다. 내시를 남편으로 모시고 평생을 살아야 했던 조선 여인들의 한이 몸서리치게 느껴졌다.
만화정은 운강고택의 주인이었던 운강 밀양 박씨, 박 시묵이 1829년 옛집을 중건하고 금천강 벼랑 위에 지은 별서다. 정자는 몸체에서 꺽여 남쪽을 향한 부분이 누마루로 되어 있어 주변 경치를 조망하기에 그만이다. 누마루 창방에는 기문 제영이 새겨진 현판이 스무개도 넘게 걸려있어 여기서 바라보는 옛 경치가 얼마나 절경이었는지를 전하고 있다. 그러나 강은 마르고 앞으로는 시멘트 다리가 놓이면서 그 경치는 변해 버렸고 오히려 주인 대신 늙은 벚나무가 혼자 지키는 이 정자를 멀찍이서 바라보는 것이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집 앞에는 300년쯤 자란 물버드나무가 몇 그루 있는데 지나가는 바람에도 일렁이는 늙은 물버들의 가늘고 긴 가지 사이로 보이는 만화정은 뒷편 언덕의 짙푸른 소나무 숲과 어울려 여전히 그림이 된다. 6. 25때 피난 온 이 승만 대통령이 이곳에 잠시 머물렀다는 현대판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다리 끝에 차를 세워두고 뛰어가서 사진 몇 장을 찍는데 꼴불견인 전기줄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운문사를 보러 온 것은 아닌데 참새가 방앗간 앞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듯이 내 또한 운문사를 그냥 지나갈만큼 모질 지를 못한다. 비구니 사찰이라서 그런지 눈길 가는 곳마다 마알갛고 정갈한 풍경이다. 해발 1000미터가 넘는 거산들이 병풍 처럼 둘러싼 영남 알프스 북쪽 자락에 위치해 막 피어나는 연꽃잎 속에 절이 앉은 형국이라고 한다. 그거야 높은 산에 올라서 봤을 때나 그런 것이고 나처럼 그냥 지나가는 길손이 둘러 보는 운문사는 평지 사찰이라 거대한 한옥 단지 처럼 질서 정연하게 앉은 폼이 돌아보는 재미는 솔직히 별로 없는 절이다. 새로 지은 대웅전이 거창하기는 하지마는 눈 맛이 나는 것도 아니고 절집이 아니라 군영 건물 같은 강당, 만세루도 크기는 대단하기는 하지마는 미학적으로는 결코 대단한 게 못된다. 밑둥 둘레가 3.5미터나 되고 나이가 500살이 넘어 천연기념물 180호 지정되었으며 일 년에 막걸리를 네 말이나 마신다는 만세루 옆 처진 소나무도 희귀하긴 하지마는 나의 관심사는 아니다.
하지마는 운문사 가는 솔밭은 운문사 보다 더 아름답다. 그 솔밭을 보러 운문사엘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솔밭의 아름다움을 내 짧은 글재주로는 그려낼 수가 없어서 유홍준 교수의 솜씨를 잠시 빌리기로 한다..... 해묵은 노송들이 시원스레 뻗어올라 소나무 터널이 높이 치켜든 우산 처럼 드리워진 솔밭 사이를 천천히 걷는다. 저 청정한 솔바람 소리에 실려오는 낮은 소리를 들으며 무작정 걷는 나는 법열에 든 스님도다도 더 큰 행복을 느낀다. 냇물이 흐르는 소리이든, 풀벌레 우는 소리이든, 바람에 스치는 마른 갈대 몸 뒤척이는 소리든, 눈보라 속에 산죽이 춤추는 소리이든, 아니면 운문사 비구니의 염불 소리이든 붉은 홍송은 하늘로 치솓고 소리는 낮게 가라앉는다.(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중에서) 저 밑둥에 보이는 상채기는 일제 시대때 전쟁에 필요한 연료를 채취하기 위해 송진을 따던 흔적이라고 하니 저리도 질긴 망국의 아픔에 새삼 가슴이 아려온다.
밀양 표충사. 표충사(寺)에는 표충사(祠)가 있다. 불교 사찰 속에 유교 사당이 있는 것이다. 사실 표충사(寺)는 표충사(祠) 때문에 더 유명해졌다면 나만의 지나친 억설일까? 정문 격인 수충루 1층 문루를 들어서면 운동장 같이 너른 마당을 이루는 표충사(祠) 영역이 먼저 나선다. 두번째가 삼층 석탑 영역, 그 다음이 대적광전 영역의 표충사(寺) 영역이다. 이 곳 말고도 해남 대흥사에도 불교 사찰 안에 유교 사당(表忠祠)이 있다. 밀양 표충사가 사명대사를 모시는 절이라면 해남 대흥사는 서산대사를 모시는 절이다.
사명대사 서산대사 기허대사의 진영을 모시고 있는 표충사(祠)는 표충서원과 유물관을 거느리고 서있다. 밀양이 나은 최고의 인물 사명대사는 새삼 설명이 필요없는 인물이다. 그에 대한 밀양 사람들의 자부심은 밀양의 중앙공원 격인 영남루 주변에 우뚝 서있는 그의 동상에서도 느낄 수 있다. 유물관에는 사명대사의 유품 300여점이 소장되어 있는데 선조가 하사했다는 금란가사와 장삼, 금제 수저와 나뭇잎 모양의 은도금잔, 패도를 비롯하여 사명대사가 평소 원불로 모셨다는 목조불상과 염주 등이 남아 있어 도술을 부려 왜장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했다는 전설 속의 사명대사를 현실의 사명대사로 느끼게 해준다.
처음엔 죽림사였다. 말 그대로 대나무 숲이 우거진 절이었다는 것에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을 만큼 표충사를 둘러싸고 있는 대나무 숲은 아직도 푸르다. 그 죽림사가 문둥병에 걸린 흥덕왕의 셋째 아들이 이 곳 죽림사 약수를 마시고 완쾌된 뒤 신령한 우물이 있는 절 영정사(靈井寺)가 되었다가 다른 곳에 있던 표충서원을 절 안으로 유치해오면서 표충사로 바뀌어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밀양 영남루. 평양의 부벽루, 진주의 촉석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명루이며 영남루에 올라 바라보는 풍광은 조선 16경중의 하나로 이름 높았다. 이곳에는 원래 영남사라는 절이 있었으나 그 절의 종각이었던 금벽루만 남은 채 스러졌는데 그 절 터에 영남루를 지은 것이다. 영남루의 야경을 보여주러 나를 안내했던 밀양에 사는 한 부부는 '삼척의 죽서루나 진주의 촉석루는 영남루에 비하면 쨉도 안된다'고 해서 이 분들의 애향심이 지나치구나 싶었는데 실제로 올라보니 그들의 자부심이 근거 없는 것만은 아닌 것이 느껴졌다. 영남루는 본루 좌측에는 기생들 대기실이나 행사 준비실에 해당하는 능파각을 우측에는 하인들의 잔치 음식을 데우고 차리고하던 침류각을 익루로 거느리고 있어 위세가 더욱 당당해 보인다. 정면에는 영남루라는 현판이 강좌웅부(낙동강 왼쪽의 큰 고을), 교남명루(한강 이남의 이름 높은 누각)라는 편액을 좌우에 거느리면서 걸려있다. 반지르르 윤기가 도는 그 너른 마룻 바닥은 아름답다 못해 감동적이기 까지 했다. 문화재 관리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 누각이든 집이든 사람이 없으면 앙꼬 없는 찜빵일 뿐이다. 이른 아침인데도 할머니 세 명이 마루에 앉아 아들 자랑이 늘어지고 있었다.
강 건너 편에서 바라본 월연정
밀양강가에 자리 잡은 월연정 원림.
이 곳에는 월연사라는 절이 있어 이 부근을 월영연이라고 불렀다는 데 조선 중종 때 한림학사를 지낸 이 태라는 분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서 이 곳에 정자와 원림을 조성하고 월연정이라 이름 붙였다. 밀양시가 배포한 관광 안내지도에는 담양의 소쇄원에 필적할 만한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별서 정원이라고 떠들고 있었지마는 내 눈에는 원림이 무엇인 지도 잘 모르는 듯 했고 관리 상태는 더욱 한심했다. 내가 갔을 때도 문이 잠겨 있어서 관리인이 돌아올 때 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비단 보자기를 걸레로 쓴다더니 월연정이야 말로 그 격이라는 생각을 지을 수가 없었다.
계곡을 건너는 다리가 이 원림의 하일라이트 중에 하나인데 원래의 통나무 다리 위에 시멘트로 쳐발라 놓아 꼴불견을 만들어 놓고 월연정으로 들어가는 원래 길은 잡초에 쌓여 뱀 나올까봐 겁날 지경이었다. 차가 드나들 수 있도록 월연정 뒤로 올라가는 시멘트 포장로를 새로 냈는데 이 또한 정자가 멋대가리 없는 그 길을 이고 있는 형국이 되어서 원림의 경치를 죽여놓고 있으니 늘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기 마련인가 보다.
멋도 맛도 없는 안내판을 잠시 읽어 보자.
월연정은 전라도 담양의 소쇄원과 비교되는 정자로 월연대를 비롯한 여러 건물들이 집합을 이루어 정자 단독으로 건립되는 조선시대 정자 건축과는 다른 독특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우측에는 월연대 영역을 두고 좌측에는 쌍경당 영역을 두었는데 계곡 사이로 다리를 놓아 두 영역을 통합하였다. 그러나 건물들이 모두 풍경이 뛰어난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세워졌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다소 무질서 해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조선 사대부들이 가능한 한 자연 환경을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쌍경당은 수월쌍청, 강물과 달빛이 함께 맑은 것이 마치 거울 같다는 뜻으로 이 곳의 풍광을 잘 설명하고 있다. 이 곳에서 우리는 조선 시대 사대부들의 자연관과 자연과 인공을 결합 시키는 우리나라 조경 양식을 살펴 볼 수 있다.
출처 : 여행길에서 만난 풍경(1)글쓴이 : 소한재 원글보기메모 :'구름에 달 가듯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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