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亭子遺憾二題산수유람학교를 꿈꾸며 2020. 7. 3. 11:51
亭子遺憾二題
*** 술맛나는 취가정에서 술맛 떨어지는 대사건(?)
샌프란시스코의 金門橋는 미국 최고의 자살 명소로 유명하다. 부산 해운대 "자살 바위"는 우리나라 최고의 자살 명소다. 어느 好事家가 있어 내게 광주 최고의 음주의 명소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나는 醉歌亭이라고 말하고 싶다.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은 의병장 김 덕령 장군이 술 취한 모습으로 권 필의 꿈에 나타나 醉時歌를 불렀다는데서 그 이름이 붙은 정자다. 이름 그대로 취가정 마루에 앉아 마시다가 취해서 노래라도 한 가락 뽑는다면 아무리 음치라도 거기서는 노래가 되고 시가 될 듯도 하다.
혹 취가정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벗은 서러움에 반갑고 임은 사랑에 좋아라. 딸기 꽃 피어서 향기로운 밤을 고추의 붉은 열매 익어 가는 밤을 그대여 부으라 나는 마시리"를 노래 부르게 되거든 잊지 마시라. 억울하게 죽은 장군을 위해 술 한잔을 붓는 것을.
내가 술 마시기 가장 좋은 장소로 취가정을 꼽는 것은 단순히 그 이름 때문만은 아니다. 툇마루 바로 앞에 서있는 "춤추는(?) 소나무" 때문이기도 하다. 두 팔을 벌리고 춤을 추는 것도 같고 요염한 여인의 몸 매무새 같기도 한 이 소나무가 취흥을 돋을 터이기 때문이다. 무희를 안고 술 마실 팔자도 못되지마는 춤추는 소나무와 함께 하는 취흥이 어디 분 냄새 풍기는 기생에 비하랴? 눈을 내리면 바로 앞에는 춤추는 소나무요 눈을 들면 멀리는 춤추는 무등의 연봉이라. 이 아니 술 맛나지 않는가?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잔 먹세 그려. 꽃 꺽어 셈하며 무진무진 먹세 그려...." (하략) 저 건너 지실 마을이나 환벽당에 머물렀던 정 송강을 불러와 그의 將進酒辭라도 보탠다면 그 이상의 안주도 없으렷다. 溪山風流라는 게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술을 잘 마실 줄도 모르지마는 이 곳 취가정에 가면 마시지 않고도 취할 수 있었다. 김 덕령의 한 맺힌 醉時歌에 취하고 춤추는 소나무에 취하고 내다보는 풍광에 취하고... 나는 거기서는 마시지 않고도 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몇해 전 취가정을 찾은 나는 취하기는커녕 마신 술 조차 확 깨는 기분이었다. 취가정 처마가 닿을 만치 코 앞에 멋이라고는 먹고 죽을래도 없는 살벌한 개인 집이 들어 서버린 것이다. 더욱 어이가 없는 것은 고샅길을 따라 걷다 보면 만나게 되는 취가정은 이제 그 집 정원을 지나서야 들어설 수 있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러고도 광주가 藝鄕이랄 수 있는지 이러고도 우리는 문화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갑자기 술 마시고 싶어지는 오후였다.
***풍암정을 향한 나의 사랑과 배신
정자는 바라보기 위해 짓는 집이 아니다. 반대로 그 안에 앉아서 바깥 경치를 내다보기 위한 집이다. 소쇄원 광풍각 방안에 앉아보면 저절로 그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풍암정 만은 예외다. 어느 땐가 부터 나에게 풍암정은 그저 바라보는 집이 되어 버렸다.내가 광주대학교로 가게되었다고 말했을 때 큰 형님의 첫마디는 "니 거 가서 우예 살래?"였다. 그만큼 전라도는 내게 먼 땅이었고 광주는 낯선 곳이었다. 아는 사람 한 사람이 없던 터라 강의가 없는 날이면 자주 가서 혼자 시간을 보내던 데가 바로 楓岩亭이었다.
충효동 가마터에서 포장 도로를 버리고 나면 비포장 길을 한참이나 오리걸음으로 올라와야 닿을 수 있었던 풍암정은 인적이 드문 곳이다. 마루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물 가 바위에 걸터앉아 濯足을 하기도 하고 정자 옆 너럭바위 위에 드러누워 낮잠도 자고... 한나절을 고스란히 거기서 빈둥거려도 사람을 볼 수가 없어 풍암정을 온전히 전세 낸 기분이었다. 풍암정을 일러주는 변변한 표지판도 하나 없었고 다행히 광주 관광 안내 팜프렛 같은데도 빠져있기 일쑤 여서 풍암정은 나의 숨겨진 휴식처요 이름 그대로 감추어진 정원(秘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지방 신문에서 불길한 기사 하나를 읽었다. 광주시가 예산을 들여 풍암정 주변을 개발하기로 했다는 소식이었다. 나의 예감은 그대로 적중했다. 소위 개발이 끝난 뒤 풍암정을 다시 찾은 나는 절망감에 몸서리쳤다. 믿었던 동네 오빠에게 강간당한 기분이었다. (문화재가 과연 개발 가능한 지?) 소위 관에서 돈 들여서 잘한다고 한 짓거리라는 게 정자로 건너가는 입구에다 서양식 시민 공원을 만들어 예의 그 서양풍의 가로등을 세우고 보통 등나무 덩굴을 올리는 파고라(?)를 세우고 풍암정을 압도하는 현대식 화장실을 지은 것이다.
개발(?)된 후로는 좀체로 풍암정을 찾지 않는다. 어쩌다 가더라도 그 현대식 공원 끝에 서서 풍암정을 건너다 보고는 돌아온다. 그리고 그 때 마다 에펠탑을 끔찍이도 싫어했던 파리의 문인, 모파상의 일화를 생각하고는 苦笑를 금치 못한다. 에펠탑을 끔직히도 싫어해 철거 운동을 주도했던 그는 매일 점심 식사는 에펠 탑 안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하는 것으로 또 유명했다. 그렇게 싫어하면서 매일 같이 에펠탑을 찾아오는 이유를 묻는 어느 기자의 질문에 보여준 그의 답은 우문현답의 모범을 보여주는 걸작이다. "내가 파리 시내에서 이 꼴불견을 보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여기뿐이기 때문에" 내가 개발(?)된 그 꼴불견을 보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국적 불명의 공원을 등지고 풍암정을 건너다 보는 것 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암정은 빼어난 정자다. 빼어난 정자였다. 판각되어 걸려있는 楓岩亭記에는 바위 주변에 단풍 나무 백여 그루가 있어서 "가을이면 서리 맞은 고운 단풍이 물 위에 비치어 물 빛이 단풍 빛이고 단풍 빛이 물빛" 이라고 적혀있다. 풍암정이라는 이름은 거기서 유래한 듯한데 풍암은 이 정자의 주인인 김 덕보(필자주 : 충장공 김 덕령 장군의 동생이다.)의 호이기도 하다. 정자가 먼저인지 호가 먼저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그 둘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어느 때 누가 쓴 것인지 정자 옆 커다란 바위에는 楓岩(단풍바위)이라는 두 자가 멋있게 새겨져 있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인데 구석에는 자그마한 방을 들였다. 楓岩精舍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것을 보면 호남 사림들의 후손들 중에서 영재들을 골라서 가르쳤던 강학소이기도 했던 듯 하다. 여름날 비 온 후에 풍암정 마루에 앉아 계곡물이 바위 사이를 감돌아 물방울 튀기며 용솟음치는 장쾌한 모습을 보면서 물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더위는 어느 틈에 가시고 가슴이 밑바닥 까지 시원해진다. "무릉도원을 어찌 그림을 보고서야 알겠느뇨"라고 읊은 임 억령(필자주 : 식영정의 주인)의 시가 걸려있는 것으로 보아 이전부터 있던 정자를 후대에 김 덕보가 중수하여 머문 것으로 보인다.
이곳 저곳 정자를 순례하면서 얻은 노우 하우 하나. 여름에는 정자를 찾지 말지어다. 정자 마루에 앉아 합죽선으로 여름을 쫓거나 정자 앞 계류에 탁족이란 여름 정취로는 최고이련만 우리 시대의 정자의 여름에는 그런 풍류가 없다. 물 좋고 경치 좋은 곳에 정자가 앉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여름에는 어김없이 그런 정자에는 수채물에 파리 꼬이 듯 사람이 꼬인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무등산 자락을 넘다가 풍암정 계류에서의 濯足 생각에 풍암정을 찾았다. 그 아담한 정자에는 수 십 명의 선행객들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웃고, 떠들고, 지지고, 볶고, 굽고, 붓고, 싸고, 토하고... 시를 짓던 정자 마루에는 질펀한 술판 화투판이 한창이었다. 철저하게 문화가, 문화재가 유린되는 그 광경에 탁족은 커녕 신발도 벗지 못하고 돌아섰다. 그 날 이후 나는 여름에는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는 참새가 되었다.
'산수유람학교를 꿈꾸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음이 발보다 앞서간 정자들 (0) 2022.02.23 정자 기행 (0) 2022.02.14 한국전통정원 답사를 떠나면서 (0) 2020.0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