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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는 아침노변정담(爐邊情談) 2008. 10. 1. 07:40
새벽에 일어나
차 한 잔을 끓인다.
쏴 ~
찻물 끓는 소리.
솔바람 소리.
코 끝을 스치는 그윽한 차향
그 내음을 사랑한다.
문득 시를 읽고 싶어졌다.
고등학교 때 산 빛 바랜 시집
누렇게 세월이 묻은 갈피마다
그 시절의 추억이 고여있다.
가을 시를 읽어야지
김 현승의 <가을의 기도>를
가만히 소리내어 읽어 본다.
역시 아름답다.
그런데 왜 겸허한 모국어라고 했지?
시를 시로, 가슴으로 읽지 않고
머리로 읽게 한 우리 국어 교육의 병폐가 지금까지..
오직 한 사람만을...
그 귀절에서 명치 끝이 저려온다.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내친 김에 <가을의 기도>와 함께
언제나 짝패 처럼 떠오르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날>도 읽어본다.
지금 집이 없는 사람들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기인 편지를 쓸 것입니다....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러이 이리 저리 가로수 길을 헤멜 것입니다.
그런 귀절들이 잘 볶은 커피향 처럼
가을과 함께 내 가슴을 적신다.
감사하는 아침.
오늘, 내 생애 최고의 날.
나의 오늘에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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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기도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時間)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가을날(라이너 마리아 릴케)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시고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마지막 과실들은 익게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南國)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의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짙은 포도주속에 스미게하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후로도 오래 고독하게 살아잠자지않고 읽고 그리고 긴편지를 쓸것입니다.
바람에 불려 나뭇잎이 날릴때, 불안스러이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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