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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자의 싸움/이어령
    수필 감상 2009. 9. 8. 23:42

    고양이 싸움과 닭싸움

    일본의 한 문필가는 한국인의 싸움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 일이 있다.

    '한국인의 싸움은 일본인의 그것과는 아주 다르다. 우선 장죽을 입에 물고 능변으로 30분이고 한 시간이고 마냥 입씨름을 한다. 그러나 노려 보기도 하고 고함치기도 하는 그 싸움은 여간해서 완력으로 번지는 일은 없다.

     

    눈을 흘기거나 팔을 걷어 붙이거나 침방울을 튀기며 서로 떠다미는 정도로 의세倚勢를 부릴 따름이다. 꼭 고양이 싸움같다. 좀 심하면 멱살을 틀어 쥐는 일이 있지만 대개는 그냥 떠다미는 것으로 판을 끝내는 일이 많다. 주먹다짐의 난투극이란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이다.

     

    으레 또 주위에는 구경꾼들이 새까맣게 모여든다. 그들은 유유히 서로 불을 빌려가며 장죽을 붙여 문다. 그러고는 연극이라도 보는 듯한 기분으로 쌍방의 싸움 내용을 근청한다.뿐만아니라 싸우는 본인들도 서로의 주 장을 군중을 향해서 소리지르면서 은근히 그들의 비판과 동정을 구한다.

     

    어떻게 하다 서로 멱살이라도 붙잡게 되면 중재자가 뛰어든다. 그러면 그 중재자를 중립지대로 해서 쌍방의 고함소리와 의세는 갑작스레 활기를 더 띠게 된다.  요컨대 한국인의 싸움은 군자의 싸움인 것이다."

     

     

    과연 일본인다운 관찰이다. 그들은 사람의 목을 배추 밑동처럼 자르고 다니는 사무라이의 싸움이나, 말보다는 아이쿠치가 그리고 침방울보다는 핏방울이 먼저 튀어나오는 에도코의 성급한 싸움만을 보아왔다.

     

    그러므로 확실히 장죽에 불을 붙이고 유유히 대결하는 그 싸움 풍경을 신기하게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우리 <한국인>의 싸움이 고양이 싸움 같다고 하면 그들<일본인>의 싸움은 꼭 닭싸움과도 같은 것이다. 언제 붙고 언제 끝났는지 모를 정도로 돌연한 싸움이다. 그러면서도 반드시 피가 흐르게 되는 격투이며 승부가 확실한 싸움인것이다.

     

     

    구경꾼은 안중에도 없다. 아니 구경꾼이 모여들었을 때는 벌써 싸움은 끝나있있다. 가을 소나기처럼 금세 햇볕이 쨍쨍하다.'마잇타< 降伏>!"진놈은 진 놈대로 이긴놈은 이긴 놈 대로 뒤끝이 산뜻하다. 그들은 그것을 두고 '앗사리'하다고 한다. 그러나 또 그만큼 잔인하기도 한 것이다.

     

     

    서양인의 결투와 악수

    서양 사람들의 싸움도 그렇다. 그들의 싸움은 결투다. 죽고 죽이는 싸움이다. 우리의 싸움처럼 천둥소리만 나다 그만두는 싸움이 아니라 폭풍이 휘몰아치는 피비린내의 싸움이다.

     

    악수의 풍습이 그것을 반증하고 있다. 흔히들 말하고 있듯이 악수가 중세기의 유습인 것만은 분명하다. 즉, 악수는 일종의 무장 해제인 것이다. 서로 오른손을 쥐고 있는 동안 상대방의 '칼'이나 '권총'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 싸움의 무기인 오른손을 그냥 내민다는 것은 최대의 호의와 친선을 뜻하는 예의다.

     

    악수할 때 왼손을 내밀거나 혹은 한 손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은 채로 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실례인가 생각해 보라.

    왼손잡이의 권총 명수도 있는지라, 오른손만으로는 어쩐지 불안하다고 생각했는지 숫제 두 손으로 상대방의 손을 잡는 악수법도 생겼다. 결국 그들의 싸움은 손의 싸움, 주먹과 칼과 권총을 전제로 한 싸움이다. 그러나 그들의 싸움이 우리의 그것처럼 미지근할 수가 없다.

     

    그것들에 비하면 담배를 피워가며 구경꾼들의 효과를 생각하며, 또 장장 반나절이나 소비하면서도 결코 주먹은 '삿대질'이나 하는 연출적효과 이외로 별로 소용이 되지 않는 우리 싸움을 보고 있으면 이 민족이 평화 민족이라는 말도 거짓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결투로 야만적인 풍속이 없었음을 그저 기뻐해야만 할 것인가?

    '군자의 싸움'이라고 하나 기왕 싸울 바에는  일생을 두고 눈을 흘기며 미지근하게 싸우는 것보다 단숨에 끝판을 내고 먼지를 터는 것이 어떠할까? 구경군의 눈치보다는 독력獨力으로 싸움을 결단하는 태도가 아쉽지 않은가? 전쟁이 있기에 평화가 있는 것이고, 평화를 위하기에 전쟁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싸움도 평화도 아닌 오늘의 휴전 상태만 하더라도 그렇지 않은가?

    보슬비가 내리다 말다 하는 지리한 장마철, 그것이 한국의 분위기이다.

     

    싸움의 근대화

    일본의 시대극 영화가 들어오고 서부활극이 이땅에 수입되고부터는 저 '군자의 싸움'에도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스피드와 스릴과 박력이 생겨났다. 이젠 웬만한 시골에 가도 서로 멱살을 붙잡고 해 넘어갈 때까지 그런 자세를 고수하는 싸움은 볼 수 없게 되었다.

     

    말로만 죽인다는 것이 아니라 정말 피로써 끝장을 내는 싸움도 있다.

    어린애들이 싸우는 걸 보아도 제법 서부 활극식으로 한다.

    그러나 유유히 장죽을 빨며 삿대질과 고함만을 치던 애교있는 그 싸움이, 시대와 더불어 자꾸 거칠어져 가는 것을 보고 우리는 한탄도 손뼉도 칠 수가 없다. 그만큼 성격은 분명해졌지만 또 그만큼 잔인해지기도 한 까닭이다. 변해가는 그 싸움 풍습을 보고 얼핏 그 호불호好不好의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부터가 '한국적'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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