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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크랩] 명량대첩
    노변정담(爐邊情談) 2009. 10. 12. 06:17

     

     

     

     

     

     

     

     

     

    울돌목은 언제나 스쳐지나가는 곳이었다.

    눈 맛이 기막히는 산 위 전망대에서 서서 잠시 바라보는 울돌목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울돌목이 목적지다.

    420여 년 전 이 바다에서 싸웠던 이 순신 장군과 그 바다에서 죽어간 수많은 고혼들을 만나러 나는 울돌목으로 간다.

     

    나는 충무공을 생각할 때 마다 눈물이 난다.

    13척으로 133척의 적선을 맞아야 했던 충무공은 그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사즉필생, 생즉필사 : 살고자 하는 이는 반드시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는 이는 반드시 살 것이다.

    그의 말 그대로였을까?

     

    울돌목에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두 개의 충무공 동상이 서있었다.

    해남쪽 우수영 앞 바닷가에 서있는 동상은 거의 등신상으로 보이는 작은 것이었다.

    대조적으로 건너편 진도쪽 녹진에 서있는 충무공 동상은 거창하고도 우람한 것이었다.

     

    작은 충무공 동상이 내게는 훨씬 가슴에 와닿았다.

    그 바닷가에서 그리고 명량대첩비에 참배 하면서도 자꾸 눈물이 났다.

     

    내가 아는 한 충무공은 전인, 완전한 인간이다.

    아무리 위인이나 영웅이라고 해도 조금은 인간적인 약점이 있기 마련인데

    이 순신은 어디 한 군데서도 흠집을 찾을 수가 없다.

    그는 충신이었으며 뛰어난 장수였으며 자애로운 아버지였다.

    오죽하면 무적의 발틱함대를 물리치고 러일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일본의 영웅,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자기를 넬슨 제독과 비교하는 것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마는

    자기를 이 순신과 비교하는 것은 이 순신 장군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말했을까?

     

    23전 23승. 그것도 항상 절대적으로 불리한 입장에서 싸운 전투에서 거둔 성과였다.

     

    이 순신이 거둔 승리 중에서도 이 곳에서의 명량대첩은 절정이자 클라이맥스였다.

    이 해협에서의 명량대첩은 세계 해전사에 가장 빛나는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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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난중일기 : 진도대교 옆 전라우수영 관광지 내 전시관에 적혀 있는 걸 기본으로 해서 일부 보완한 것이다.

     

    [ 6 일(갑오) : 맑음. 이른 아침에 망군이 와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왜선이 울돌목을 거쳐 곧바로 진을 치고 있는 곳으로 오고 있다.”고 보고했다. 여러 장수를 불러 약속을 밝히고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아가니, 적선 1 백 33 척이 우리 배를 빙 에워싸는 것이었다. 대장선이 홀로 적진 한가운데 들어가 포환과 화살을 비가 퍼붓듯이 마구 쏘아대는데도 다른 배들은 바라보기만 할 뿐 진군하지 않아 사태를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배 위에 있는 군사들이 서로 쳐다보며 겁에 질려 있으므로 나는 그들을 부드럽게 타이르며, “적이 천 척이 되어도 감히 우리 배에는 덤벼들지 못할 것이니, 추호도 동요하지 말고 사력을 다해 싸우도록 하라.”고 했다. 그리고 다른 여러 배를 돌아다보니, 이미 1 마장 가량 물러가 있고,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도 멀리 떨어져 가물가물 보일 뿐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곧바로 배를 돌려 중군 김응함의 배로 가서 목을 베어 효시하고 싶었지마는, 내가 배를 돌리면 여러 배가 더욱 멀리 물러나고 적선이 더 바싹 달려들 태세이므로 중군에게 군령 내리는 기와 초요기를 세웠다, (*.초요기:군사를 부르는 깃발) 그러자 김응함의 배가 가까이 다가오고, 거제현령 안위의 배도 가까이 다가왔다. 안위의 배가 먼저 왔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친히 안위를 불러, “네가 군법에 죽으려고 그러느냐.” 하고는 다시, “안위야, 군법에 죽으려느냐, 물러나면 살 것 같으냐.”고 말하니, 안위는 황급히 적진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또 김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장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하지 않으니, 그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할 것이되, 적세 또한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한다."고 하였다.

     

    적장의 배와 다른 적선 두 척이 안위의 배에 바싹 붙고, 안위의 격군 7~8 명이 물에 뛰어들어 헤엄을 치니 거의 구하지 못할 듯싶었다. 그래서 나는 배를 돌려 바로 안위의 배가 있는 곳으로 갔다. 안위 배 위의 남은 군사들은 목숨을 걸고 마구 쏘아대니 내 배의 군관들도 화살을 빗발같이 쏘아대어 적선 세 척을 모조리 섬멸시켰다. 녹도만호 송여종과 평산포대장 정응두의 배가 가세했다.

     

    안골포에서 투항해온 왜놈 준사(俊沙)가, "저 무늬 있는 붉은 비단옷을 입은 놈이 적장 마다시다"라고 하였다. 나는 김돌손을 시켜 끌어 올린 후 토막 내니 적의 기운이 크게 꺾였다. 우리는 북을 치며 나아가 총공격을 했다. 우리를 에워쌌던 적선 30 척도 깨뜨려 버리니 모든 적이 당해내지 못하고 달아나 다시는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천만다행이었다. 그곳에 머무르려 했지만 물이 빠져 배를 정박시킬 수 없으므로 건너편 포로 진을 옮겼다가 달빛을 타고 다시 당사도로 옮겨 밤을 보냈다.  – 우수영관광지 전시관 - ]


    2. 명량대첩의 전말 : 위키백과에서 가져온 것으로 이보다 더 잘 설명된 것이 없어 여기에 인용한다. 알면 알수록 가슴이 뛰고, 자랑스러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 명량대첩 : < 조선 수군의 재건 > : 이순신이 모함을 받고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서 파직당한 뒤 원균은 새로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일본 수군과 접전을 벌였으나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여 숱한 장병들이 전사하고, 전선도 대부분 잃었으며, 조선은 해상권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이에 선조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자 이순신을 다시 복권하여 삼도수군통제사로 기용하였다.

     

    이 때 조선군에게 남은 전선은 겨우 12척에 불과하였다. 이순신이 1597년 음력 8월 18일 회령포에서 전선 10척을 거두었고, 그 후 2척이 더 회수됨으로써 12척이 남은 전선의 전부였던 것이다. 나중에 명량 해전을 앞두고 또 1척이 추가되어 13척으로 늘었지만, 일본군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란 숫자였다.

     

    하지만 워낙 칠천량의 패배의 손실이 커서 선조는 한때 수군을 폐지하려고도 하였다. 그러나 이때 이순신은 선조에게 장계를 올려 “지금 신(臣)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남아 있나이다. 신이 죽지 않는 한, 적들은 감히 저희들을 업신 여기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내용으로 자신 있게 수군 폐지 불가론을 펴는 바람에 수군 폐지론은 잠잠해졌다. 그 후 이순신은 남해안 일대를 돌아다니며 흩어진 병사들과 병장기를 모아 수군 재건에 전력을 다했다. 이순신은 음력 8월에 일본 전투선이 어란포에 나타난 것을 격퇴한 후, 음력 9월에 일본의 함대가 어란포에 들어온다는 보고를 받고 음력 9월 15일에 벽파진에서 우수영(右水營)으로 진을 옮긴다.

     

    < 일본 수군의 기동 > : 이때 어란포의 일본 수군은 구루시마 미치후사와 도도 다카토라, 와키사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가 지휘하는 330여 척의 전선(뒤에 200척이 있었음)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중 명량 해전에 참가한 부대는 구루시마와 도도가 이끄는 133척의 함대였다. 일본 수군은 목포 쪽으로 흐르는 북서류를 타고 명량해협을 통과하여 전라도로 서진할 계획이었다. 명량해협은 진도와 화원 반도 사이에 있는 좁은 수로로 조류는 국내의 수로 중에서 가장 빠른 곳이다. 빠른 수로를 이용하여 얼마 안 되는 조선 수군을 압박해서 물리친 다음 전라도로 진격하려는 것이었다.

     

    일본 수군은 1592년의 전훈을 참조하여 내륙으로 깊숙이 진격하기 전에 반드시 서해의 해상권과 전라도를 장악하고자 하였다. 이순신이 복귀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13척의 전선만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이무렵 일본 수군의 분위기였다. 이순신과 전투에서 패배 1호를 기록한 도도 다카토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칠천량 전투의 승리가 일본 수군의 사기를 드높여준 탓이었다. 우세한 전력을 앞세워 이번 기회에 가능하면 이순신도 잡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전쟁은 완전히 승리로 끝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한편, 이순신도 일본 수군의 기동 보고를 받고 장병들에게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라고 말하며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출정하였다.

     

    < 울돌목에서의 접전 > : 울돌목(명량해협)은 수심이 얕아 실제 배가 항해할 수 있는 폭도 좁았고, 그 중에서도 밀물 때 넓은 남해의 바닷물이 좁은 울돌목으로 한꺼번에 밀려와서 서해로 빠져 나가면서 해안의 양쪽 바닷가와 급경사를 이뤄 물이 쏟아지듯 빠른 급조류가 흘렸다. 울돌목 물살의 또 다른 특징은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암초가 솟아 있다는 점이다. 급조류로 흐르던 물살이 암초에 부딪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소용돌이치게 되는 것이다.

     

    조선 수군은 이 울돌목에서 결전을 벌일 계획이었으나 작전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서 5킬로미터 떨어진 벽파진에서 진을 치고 15일간이나 일본 수군을 유인하며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수군 역시 그런 급류에는 이미 어느 정도 적응되어 있었고 오히려 그런 급류를 타고 수가 적은 조선 수군을 단숨에 밀어부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일본 수군의 탄생지라 할 수 있는 일본의 시코쿠(四國)의 미야쿠보 지역도 울돌목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조류가 흐르며 물의 속도 또한 울돌목에 못지 않다고 한다. 특히 이 지역을 근거로 했던 수군은 구루시마 수군이었다(원래 이들은 왜구였다고 한다). 명량해전의 일본군 측 지휘관이었던 구루시마와 그의 산하 병사들은 이 시코쿠에서 잔뼈가 굵었기 때문에 물살을 이용해 능숙하게 항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명량 해전에 참전한 일본 수군에게 울돌목의 빠른 물살은 그것만으로는 위험한 것이 아니었다. 학자들은 오히려 일본 수군이 울돌목으로 과감하게 진입한 것은 빠른 급류를 이용하여 조선 수군을 격파하고 전라도로 진격하려는 것으로 추정한다.

     

    < 경과 > : 이순신은 항상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싸웠다. 이번에도 이순신은 일본군이 조선군을 가볍게 보고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그들을 유인하고자 했다. 음력 9월 7일, 조선 수군은 벽파진 근처에서 일본 수군의 소함대를 물리쳤다.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이 13척뿐임을 알고, 지난 전쟁 기간 동안 최대의 적이었던 이순신과 조선 수군을 완전히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벽파진으로 우수영을 옮긴 이튿날인 음력 9월 16일 오전, 일본 수군 200여 척이 순조(順潮)를 타고 울돌목으로 들어섰다. 이 중 70여 척이 입구 쪽에 남고 나머지 133척이 해협으로 진입했다. 이 때 해류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즉, 일본 수군이 해류의 흐름과 일치하는 순방향이었다.

     

    조선 수군 13척의 전선도 해협으로 들어서서 일본 수군을 맞이했다. 전투가 시작되자, 조선군 일부가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10배가 넘는 적의 기세에 겁을 먹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이 탑승한 기함은 계속 자리를 고수하며 부하들을 독려했고, 중군장 첨사 김응함과 거제도 현령 안위를 심하게 다그쳤다. 두 사람의 배가 적진으로 공격하기 시작하자 녹도 만호 송여종, 평산포 대장 정응두와 멀리 대략 1킬로미터 정도 물러나 있던 전라우수사 김억추도 돌격에 가세했다. 특히 안위의 군함으로 일본 수군의 공격이 집중되었다. 그 와중에 일본 수군 지휘관 구루시마 미치후사가 발견되었다. 안위를 공격하다가 되려 탑승하고 있던 군함이 파괴되어 물에 빠진 것이다. 이 광경을 이순신 기함에 탑승하고 있던 항왜 준사가 발견했다. 그는 안골포 해전 이후 귀순하여 이순신의 부하가 되어 있었다.

     

    이순신은 구루지마를 끌어올릴 것을 명령했다. 갈고랑쇠에 낚여 배 위로 끌려 올라온 구루지마는 격전의 와중에 전사했다. 잘린 구루지마의 목은 기함에 높이 걸렸고, 조선 수군의 사기가 급격히 올라갔다. 반면에, 전투 중에 지휘관이 적군에 의해 참수되고 그 목이 돛대에 매달리는 것을 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던 일본 수군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졌다.

     

    거기에 또 하나의 악재가 일본 수군을 덮쳤다. 오후가 되자 해류의 방향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거꾸로 조선 수군이 순조가 되고, 일본 수군에 역조(逆潮)가 되었다. 지휘관을 잃고, 해류 때문에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너무 좁은 해역에 많은 배가 들어서는 바람에 뒤로 돌아서는 것도 쉽지 않아 일본 수군의 군함들은 마구 엉키었다. 조선 수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포격전과 충파를 거듭했고, 판옥선에 비해 약하여 부딪히면 부서지던 일본의 아타케부네 등이 줄줄이 파괴되면서 일본 수군의 시체와 배의 잔해가 바다를 덮기 시작했다. 너무 많은 배가 엉켜 있어서 대충 대포를 쏴도 맞았다. 133척의 대함대를 13척으로 추격하는 형세가 되었던 것이다.

     

    오후 4시경, 일본 수군은 전멸하였다.

     

    < 결과 > : 일본군은 333척 중 31척을 잃었다. 이로써 수륙 병진 전략은 또 한 번 좌절되었고 일본군은 내륙 깊숙이 쳐들어가지 못하고 남해안 일대에 서로 지원이 가능한 거리 내에 분산되어 왜성을 쌓고 농성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정유재란은 농성하는 일본군을 조명연합군이 수륙 양면에서 협공하는 공성전으로 바뀌었다. 조선의 전략적 승리였다.

     

    그러나 이 전투의 패배가 일본군에 안겨준 심리적 타격은 더 컸을 것이다. 특히 칠천량에서 승리한 직후에 고작 13척의 이순신에게 패했다는 사실은, 파손된 90여 척은 수리 후 사용 가능했기에 잃은 배는 얼마 안 되지만, 이순신에 대한 두려움은 예전보다 더 커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바뀐 전쟁 양상과 더불어 2년간 별다른 해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이 벌어질 때까지 2년간 해전은 3회를 기록했고, 나머지는 수군도 육군과 협력하여 남해안 일대의 왜성 공격에 참가한 것이었다. 물론 명나라의 화평 노력으로 소강 상태에 빠진 것도 한 이유다.

     

    < 승리의 원인 > : 조선 수군의 승리의 요인이었던 것은 늘 전함과 함포였다.

     

    일본군 전함은 첨저선으로 뱃머리가 뾰족하고 판자의 연결에 쇠못을 사용한 아타케부네(安宅船)고, 조선군의 전함은 뱃머리가 둥글고 나무못을 사용한 판옥선이다. 또한 판옥선의 크기는 일본군의 가장 큰 배인 아타케부네보다 컸다. 뱃머리가 둥글다는 것은 물에 잠기는 부분이 적어 회전이 용이하였고, 반면 쇠못은 녹이 슬어 부식되는 결과를 가져와 배의 안정성에 심각한 문제를 안겨주었고, 충격에 약해 쉽게 파손되었다. 조선 수군은 포격전만으로 전투를 수행하지 않았고, 필요한 경우나 불가피한 경우 충각전술로 일본군의 배를 부서뜨리는 돌격전법도 자주 구사했던 것도 이러한 배의 특성 덕분이었다. 다만 거북선이 없었다.

     

    함포는 임진왜란 전체를 통틀어 가장 효과 좋은 조선군의 무기였다. 다양한 종류와 구경의 화포를 사용하였으며, 오늘날 다연장포에 비교할 수 있는 신기전, 박격포에 해당할 비격진천뢰, 대형 로켓 병기라 할 만한 대장군전 등 신무기도 많이 사용되었다. 반면 일본군은 화포 주조 능력이 조선에 비해 뒤떨어져 그나마 있는 화포도 갑판 바닥에 고정해서 사용하지 않고 상부 구조물에 매달아 사용했다. 배가 약해서 포의 반동을 견뎌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공중에 줄로 주렁주렁 매달린 화포는 그 위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또한 울돌목의 지형을 이용한 이순신의 전략과 병사들의 사기도 승리의 요인으로 들 수 있다.

     

    당시 이순신은 울돌목에 쇠사슬을 설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군은 해협에 설치된 ‘쇠사슬’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목포의 해양 방어 사령부에는 지금도 수백 척의 배를 끌어당길 때 쓰는 ‘막개’가 있는데 학자들은 이순신 장군이 울돌목에서 이런 막개를 이용한 쇠사슬 전법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울돌목의 폭은 280∼320미터 안팎이다. 여기에다 배를 끄는 데 필요한 쇠사슬의 길이를 감안하면 450미터 안팎의 쇠사슬이면 충분하다. 쇠사슬의 무게는 배의 무게를 감안하여 4톤 정도로 추정했다.

     

    《KBS 역사스페셜팀》은 당시의 전투를 다음과 같이 재현했다.

     

    수중 철쇄(쇠사슬)는 지금 진도대교가 있는 폭이 가장 좁은 자리에 걸었다. 양쪽에 막개를 박아놓고 쇠줄은 물 속에 잠기게 숨겨놓은 뒤 왜수군을 기다리는 것이다. 1597년 음력 9월 16일 오전 11시경, 어란진에서 출발한 333척의 일본 수군은 우수영으로 흐르는 밀물을 타고 빠른 속도로 울돌목에 들어선다. 그들이 울돌목에 들어서자 수중 철쇄에 걸려 차곡차곡 쌓이며 서로 부딪쳐 여지없어 부서진다. 오후 1시경 밀물이 끝나고 물길이 멈춘다. 일본 수군은 좁은 수로에 갇혀 오도가지 못한 채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이순신 장군의 함선들이 전진하며 각종 화포를 빗발처럼 퍼붓는다. 다시 썰물이 되는 순간, 정지했던 물길이 거꾸로 바뀌어 왜수군 쪽으로 흐른다. 유리하던 조류마져 불리하게 변하자 조선 수군이 떠내려가는 일본 수군을 완전히 섬멸한다.

     

    그러나 이런 명량 해전의 전투 위치와 쇠사슬 사용 문제에 대해 다른 주장이 있다. 다음은 해군사관학교 해전사 담당 이민웅 교수(현역 해군 소령)의 주장이다.

     

    먼저 전투 위치는 명량해협(울돌목)이 아니라 해협을 통과한 뒤 해남군을 따라 우측으로 구부러진 지점인 전라우수영(해남군 문내면) 앞바다라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난중일기》 음력 9월 16일자를 제시한다. 그 부분을 보면 “왜 함대의 접근 보고를 받고 전투 준비를 마친 뒤 바다로 나갔는데 곧 바로 왜선 133척이 우리 전선들을 에워쌌다.”라고 되어 있다. 명량해협(울돌목)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장면이라는 것이 이민웅 교수의 주장이다.

     

    또, 명량에서 쇠사슬을 설치해 왜선을 격퇴했다는 설명에 대해서도 후대 영웅담이 확대·재생산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설화’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전라좌수영 앞에 방어용 쇠사슬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명량해전에서 쇠사슬은 물살이 세서 걸 수가 없었으므로 사용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 쇠사슬은 당시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자신의 행적을 직접 기록한 《현무공실기》에 “철쇄(鐵鎖) 즉 쇠사슬과 철구(鐵鉤)로 적선을 깨뜨렸다.”란 기록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문제는 오랫동안 이순신의 신화를 벗겨내고 사실을 조명하겠다는 소장파 학자의 주장이다. 따라서 앞으로 관련 전사 전문가들이 보다 정확한 검증 과정을 거쳐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 마다시와 구루지마 미치후사 >

     

    《난중일기》에는 마다시(馬多時)로 기록되어 있으나 본명은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가 맞으며 일본의 유명한 해적 가문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당항포 해전에서 이순신의 함대와 맞서 싸우다 전사한 구루시마 미치유키(來島通之)의 동생으로 알려져 있다. 형의 원수를 갚고자 명량해전에서 선봉에 섰으나, 결국은 조선 수군과 전투에서 그 자신도 전사함으로써 가문이 멸문의 위기를 맞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 위키백과(http://ko.wikipedia.org)


     


     

    출처 : 명량대첩
    글쓴이 : 소한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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