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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해목(법정)
    수필 감상 2010. 3. 22. 10:25

    설해목(雪害木) 

     

     

    해가 저문 어느날, 오막살이 토굴에 사는 노승 앞에 더벅머리 학생이 하나 찾아왔다.

    아버지가 써 준 편지를 꺼내면서 그는 사뭇 불안한 표정이었다.

    사연인즉, 이 망나니를 학교에서고 집에서고 더 이상 손댈 수 없으니,

    스님이 알아서 사람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노승과 그의 아버지는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편지를 보고 난 노승은 아무런 말도 없이 몸소 후원에 나가 늦은 저녁을 지어 왔다.

    저녁을 먹인 뒤 발을 씻으라고 대야에 가득 더운 물을 떠다 주었다.

    이때 더벅머리의 눈에서는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아까부터 훈계가 있으리라 은근히 기다려지기까지 했지만

    스님은 한 마디 말도 없이 시중만을 들어 주는데에 크게 감동한 것이다.

    훈계라면 진저리가 났을 것이다.

    그에게는 백천 마디 좋은 말보다는, 다사로운 손길이 그리웠던 것이다.

    이제는 가고 안 계신 한 노사老師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내게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노사의 모습이다.


    산에서 살아보면 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만,

    겨울철이면 나무 들이 많이 꺾이게 된다.

    모진 비바람에도 끄떡 않던 아름드리 나무들이,

    꿋꿋하게 고집스럽기만 하던 그 소나무들이 눈이 내려 덮이면 꺾이게 된다.

    가지 끝에 사뿐사뿐 내려 쌓이는 그 가볍고 하얀 눈에 꺾이고 마는 것이다.

     

    깊은 밤,

    이 골짝 저 골짝에서 나무들이 꺾이는 메아리가 울려 올 때,

    우리들은 깊은 잠을 이룰 수 없다.

     

    정정한 나무들이 부드러운 것 앞에서 넘어지는 그 의미 때문 일까.

    산은 한겨울이 지나면 앓고 난 얼굴처럼 수척하다.

    사밧티의 온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던

    살인귀 앙굴리말라를 귀의시킨 것은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신통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자비였다.

    아무리 흉악무도한 살인귀라 할지라 도 차별없는

    훈훈한 사랑 앞에서는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바닷가의 조약돌을 그토록 둥글고 예쁘게 만든 것은

    무쇠로 된 정이 아니라, 부드럽게 쓰다듬는 물결이다.


    - 법정 스님의 <무소유>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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