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대정 원림을 찾아옛집을 찾아가는 길 2010. 4. 11. 22:43
임대정 원림을 찾아서
사평에 있는 임대정을 찾아간다. 임대정의 봄빛을 거닐며 상춘곡을 읊고 싶었다. 임대정은 조선 철종 때 병초참판을 지냈던 沙厓 민주현이 조성한 정자와 원림이다. 그는 당시 안동 김씨 세도 아래 부폐한 조정에 반발하여 과거제의 폐해를 지적하는 상소를 올리고 병조참판으로서 10만 양병설을 주장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그가 쓴 임대정기를 보면 그의 나이 55살 때 정자를 세우고 자연에 파묻혀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였으니 그 현장이 바로 이 임대정 원림이다. 이 곳은 이전부터 풍광이 수려하여 선조때 문인 考槃 남 언기가 초정을 짓고 수륜대(垂綸臺)라 이름 짓고 전원 생활을 하던 곳이었다. 고반이란 ‘세상을 피하여 자연과 벗하며 제 마음대로 즐긴다’는 뜻을 가진 말이며 수륜대란 ‘낚싯대를 드리우고 즐기는 언덕’이라는 뜻이다. 세월과 함께 황폐해진 이 곳을 사애 선생이 다시 정자를 세우고 연못을 만들어 臨對亭이라 이름하였다. 임대정이라는 이름은 송나라 때 주돈의가 강서성 여산에 있는 연화봉 기슭에 터를 잡고 살면서 ‘아침 내내 물가에서 여산을 바라보며 지냈다’는 終朝臨水對廬山에서 따왔다. 그는 주돈의를 무척 흠모했던 듯 원림 곳곳에 그의 <愛蓮說>과 관련된 이름을 붙이고 즐겼다. 임대정은 뒤로는 봉정산이 배산을 이루고 있고 앞쪽으로는 사평천이 임수(臨水)하여 문자 그대로 산을 對하고 물에 臨하고 있다. 사평천의 동쪽 언덕 위에 앉은 정면 3간 측면 2간의 팔작 지붕의 정자가 별서의 중심 건물이다. 길에서 계류를 끼고 왼쪽으로 돌아 언덕 위에 다다르면 평평한 마당에 정자가 앉고 그 옆에 작은 방지가 나타난다. 방지 뒤쪽으로는 대숲이 있어 정원의 소쇄한 분위기를 돋우고 있다. 임대정 원림은 정자가 앉은 언덕 위 부분(상원)과 언덕 아래의 연지(하원)로 구분된다.
정자 옆 방지에는 洗心라 음각된 돌이 세워져 있고 마당쪽 못 가에는 사방 육면체의 판판한 돌을 놓고는 앞면에는 기임석 임술춘, 오른쪽에는 披香池 왼쪽 면에는 挹淸堂이라 음각하였다. 피향지의 香자와 읍청당의 淸자는 주돈의의 애련설에 나오는 ‘연꽃 향기는 더욱 멀리 맑게 퍼진다’라는 구절에서 빌어다 쓴 말이다. 결국 피향지라는 말은 연꽃 향기가 멀리 퍼지는 못이며 읍청당의 읍청은 연꽃이 맑은 향기를 붙잡아 당기는 집이라는 뜻이다. 기임석이란 걸터앉는 돌이라는 뜻이다. 1861년 봄. 뒤쪽 입구에는 沙厓先生杖屨之所 : 사애 선생이 지팡이를 짚고 거닐던 자리이라는 뜻이다.
****************************************************************************************************
애련설(愛蓮說) - 주돈이(朱敦頤)
水陸草木之花, 可愛者甚蕃. 晉陶淵明, 獨愛菊, 自李唐來, 世人甚愛牧丹, 予獨愛蓮之出淤泥而不染, 濯淸漣而不妖, 中通外直, 不蔓不枝, 香遠益淸, 亭亭淨植, 可遠觀而不可褻翫焉. 予謂菊花之隱逸者也, 牡丹花之富貴者也, 蓮花之君子者也. 噫, 菊之愛, 陶後鮮有聞, 蓮之愛, 同予者 何人, 牧丹之愛, 宜乎衆矣.
물과 육지에 자라는 꽃 가운데 사랑할 만한 것이 매우 많다. 진(晋)나라의 도연명(陶淵明)은 유독 국화를 사랑했고, 이(李)씨의 당(唐)나라 이래로 세상 사람들이 매우 모란을 좋아했다. 나는 유독, 진흙에서 나왔으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고 출렁이는 물에 씻겨 깨끗하나 요염하지 않고, 속은 비어있어서 통하고 밖은 곧으며, 덩굴도 뻗지 않고 가지를 치지 아니하며,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고, 꼿꼿하고 깨끗이 서 있어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으나 함부로 가지고 놀 수 없는 연꽃을 사랑한다. 내가 말하건대, 국화는 꽃 중에 속세를 피해 사는 자요, 모란은 꽃 중에 부귀한 자요, 연꽃은 꽃 중에 군자다운 자라고 할 수 있다. 아! 국화를 사랑하는 이는 도연명 이후로 들어본 일이 드물고, 연꽃을 사랑하는 이는 나와 함께 할 자가 몇 사람인가? 모란을 사랑하는 이는 마땅히 많을 것이다
주돈이 周敦頤 [1017~1073]
자 무숙(茂叔). 호 염계(濂溪). 도주(道州: 湖南省 道營縣) 출생. 지방관으로서 각지에서 공적을 세운 후 만년에는 루산[廬山] 기슭의 염계서당(濂溪書堂)에 은퇴하였기 때문에 문인들이 염계선생이라 불렀다. 북송의 사마광(司馬光) ·왕안석(王安石)과 동시대의 인물이다. 그는 도가사상(道家思想)의 영향을 받고 새로운 유교이론을 창시하였다. 즉, 우주의 근원인 태극(太極:無極)으로부터 만물이 생성하는 과정을 도해(圖解)하여 ‘태극도(太極圖)’를 그리고 태극→음양(陰陽)의 이기(二氣)→오행(五行:金 ·木 ·水 ·火 ·土의 五元素)→남녀→만물의 순서로 세계가 구성되었다고 논하고, 인간만이 가장 우수한 존재이기 때문에, 중정(中正) 인의(仁義)의 도를 지키고 마음을 성실하게 하여 성인(聖人)이 되어야 한다는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고, 우주생성의 원리와 인간의 도덕원리는 본래 하나라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저서에는 《태극도설(太極圖說)》 《통서(通書)》가 있으며, 수필 《애련설(愛蓮說)》에는 그의 고아한 인품이 표현되었다. 남송의 주자(朱子)는 염계가 정호(程顥) ·정이(程燎) 형제를 가르쳤기 때문에 도학(道學:宋代의 新儒敎)의 개조라고 칭하였다. (자료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옛집을 찾아가는 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용학 가옥(광주 북구 매곡동 소재) (0) 2010.04.18 함벽정 (0) 2009.12.22 표옹 송영구 고택의 별당, 망모당 (0) 2009.12.21 나주 도래마을 홍기헌 가옥 (0) 2009.10.10 나주 도래마을 홍기창 가옥 (0) 2009.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