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시대 마지막 처사를 꿈꾸며차 한잔의 단상 2005. 10. 27. 11:55
“처사라고 써야 된데이.” 평생을 밭 두렁 끝에서 가난한 농부로 살다가 가신 아버님의 제삿날, 지방을 쓰기 위해 내가 지필묵을 꺼낼 때면 고희를 바라보는 형님들은 꼭 이렇게 말한다. 이렇다할 관직을 지내지 못했던 망인의 지방은 보통 顯考學生府君神位라고 쓰지마는 학생 대신 處士라고 쓰라는 것이다.
옛말에 ‘왕비를 배출한 집안보다도 대제학을 배출한 집안이 낫고, 대제학을 배출한 집안보다도 문묘의 배향자를 낳은 집안이 낫고, 문묘의 배향자를 배출한 집안보다도 처사를 배출한 집안이 낫다’고 했다.
사실 모든 조선 사대부들의 지향점은 처사였다. 벼슬을 하지 않고 산간에 조용히 묻혀 사는 선비를 흔히 처사라 부르는데 왜 그들은 모두 처사가 되고 싶어 했을까? 중국 위(魏)·진(晉)의 정권교체기에 정치권력에는 등을 돌리고 대밭에 모여 거문고와 술을 즐기며 청담(淸談)으로 세월을 보낸 일곱 명의 선비들 이른바 죽림칠현이나 그것을 흉내 낸 고려의 죽림(해좌)칠현이나, 이 성계의 조선왕조, 역성 혁명에 저항해 충신불사이군을 내세우면서 두문동에 들어가 불을 질러도 나오지 않고 타죽었던 두문동 72현. 杜門不出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했던 그들은 처사 내지는 거사의 원조가 되었다.
나주의 전통마을인 도래마을 한 복판에 있는 종가집 사랑채에는 <安分窩>라는 편액이 걸려있었다. 사랑채만도 열 칸도 넘는 대단한 이 집에 안분지족하는 움막이라니... 경주 근교 양동마을 월성 이씨 소종가의 당호는 <守拙堂>이다. 회재 이 언적의 4세손 이의잠의 호에서 당호를 얻었다. 조선시대 압구정동이었던 양동 마을에서도 대표적인 반가인 이 집이 졸렬함을 지키고 사는 집이라니... 퇴계가 수 십 개의 관직을 거치고도 마지막에 처사로 남고 싶어 했듯이 조선의 양반들은 고대광실에 살면서도 처사인 양 살고 싶어 했다. 처사는 사대부만의 꿈이 아니었다.흔히 숨겨진 정원, 비원으로 불리는 창덕궁 후원 한 구석에 기오헌(寄傲軒)이 숨은 듯이 비껴 앉아있다. 불과 온돌방 하나와 작은 대청과 누마루로 구성된 정면4간 측면3간의 지극히 단출한 집인데 그것도 북향으로 앉아 있다. 위치도 위치려니와 규모도 작고 단청도 칠하지 않은 집인지라 눈 여겨 보는 이가 별로 없다. 寄傲는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에 나오는 倚南窓以寄傲 審容膽之易安(의남창이기오 심용슬지이안)이란 구절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 집은 효명세자가 즐겨 들러 독서와 사색의 장소로 쓰곤 했다고 한다. 곧 지존이 될 몸인 그가 왜 이런 보잘 것 없는 집을 사랑했을까?
구중궁궐 속에서 추상같은 법도에 묶여 살던 왕세자가 이 조그만 집에서 꿈꾸던 것은 “남창에 기대어 마냥 마음 내키는대로 버려두니 비록 겨우 무릎 하나 들일만한 작은 집이지만 이 얼마나 편한가?” 도 연명이 누렸던 그런 자유가 아니었을까? 자연 속에 숨어 안분지족하며 사는 처사의 자유를 그는 그리워 했던 듯 하다.
남종문인화의 모범작, 예찬의 용슬재도(容膝齋圖)는 안빈낙도하는 문인(화가)들의 지향점을 잘 보여준다. 역시 귀거래사의 그 구절에서 이름을 얻은 ‘무릎을 겨우 허락하는 작은 집’이라는 당호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그 그림에는 가난하지만 궁색하지 않으며 자연에 묻혀 옳고 바르게 살고자 했던 옛 문인(선비)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예찬은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골동품과 미술품을 많이 모았는데 그것들을 친구와 친지들에게 다 나눠주고 자신은 빈 손으로 떠돌며 그림을 그렸던 사람이다.
원나라는 한족 왕조가 아닌 유목민족인 몽고족이 지배했던 왕조다. 중국인들에게는 오랑캐나 다름없는 이민족 왕조에서 벼슬살이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한 많은 문인들이 재야에 숨어 지냈다. 그런 당대의 지식인들 가운데 특히 시서화에 뛰어났던 네 사람을 원말사대가라 부르는데 예찬, 황공망, 오진, 왕몽이었다. 소상팔경도류의 남종문인화에서 자연 속에 묻혀사는 은자들이 바로 그들의 자화상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영향은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이어져 많은 사대부들이 세속적인 출세보다는 자연 속에서 학문하는 즐거움, 청빈한 삶을 살고자 했다. 조선의 모든 선비들이 모두 처사가 되고 싶어했던 것 또한 그러한 시대적 배경에 연원하고 있다. 실제로 처사라 할 만 이는 남명 선생이 유일할 듯 하나 조선의 수많은 선비들이 처사를 자처했다는 사실이 조선 선비들의 정신세계가 어디를 지향하고 있었는 지를 웅변으로 보여준다. 소쇄원, 환벽당, 풍암정, 취가정, 독수정, 명옥헌, 식영정, 면앙정, 송강정....은 사화나 정쟁으로 얼룩진 관직을 버리고 낙향, 무등산 계곡에 정자를 짓고 은거했던 계산풍류의 현장들이자 호남 처사들의 문화공간이다. 소쇄원 담장에는 내가 늘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문패라고 말하는 瀟灑處士梁公之廬라는 현판이 박혀있다. 소쇄원의 주인이었던 양 산보 선생 또한 스스로 처사임을 자처하고 있지 않은가?
처사, 그는 누구인가? 지은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마는 청구영언에 실려있는 <처사가>는 처사의 삶을 손에 잡힐 듯이 그려내고 있다. 사음보의 엄격한 율격을 갖추고 있는 가사이나 내 재주로는 음률 까지 맞추는 것은 꿈도 못 꾸고 뜻을 중심으로 풀어본다.
타고난 재능 쓸 데 없어 부귀공명 다 하직하고
산간에 숨어사는 선비나 되리라.
베 옷에 지팡이 짚고 나서니 석양에 물든 경치가 좋구나.
미투리 신은 걸음으로 천천히 내려가니
쓸쓸한 잠자리 사립문은 닫혀있고
고요한 살구 동산에 개 짓는 소리만 요란하다.
경치는 끝간 데 없고 숲은 온통 푸르다.
푸른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싼 곳,
흰 구름 자욱한 그 곳에 집을 짓고
어부인 양 대나무 장대에 도롱이에다 삿갓을 젖혀 쓰고
강가 모래밭으로 십리를 내려가도
(보이는 건) 날아가는 흰 물새뿐이로다.
돛 높이 달고 한없이 너른 바다로 노를 저어 내려가
큰 잉어 낚아 올리니 그 유명한 송강의 농어가 이에 비길텐가?
맑은 강에 해가 진다. 천천히 물가를 돌아드니
노을에 젖은 앞 마을, 뒷 마을, 두 세집이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 잠겼구나.
아, 기산이 여기가 아닌가? 별천지가 바로 여기로다.
도연명이 연못가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고 명리를 떠나 살았다더니
수천 갈래로 늘어진 수양 버드나무가 늘어진 이곳이 거기가 아닌가?
엄 자릉의 못 가인가? 금빛 비늘을 번쩍이며 물고기가 뛰논다.
어느 아이 벗 삼아 양반들이 사는 고을을 바라보니
소 등에 올라탄 목동은 한가하니
수 만 가지 사소한 일도 여기서는 큰 일이 된다.
동림산 소쩍새 슬피우니 술에 취한 회포가 돋는 듯
술이 깨어 일어나니 뛰어난 경치 그지 없다.
갔다가 다시 돌아온 사슴 벗이 되어 수많은 골짜기와 산봉우리를 오며가며
사람의 발길이 드물어 이끼 낀 돌길로 막혔으니
속세의 소식을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일 없는 몸은 나뿐인가 하노라
거친 삼베 옷에 나물 밥에도 안빈낙도하던 선비들. 조선의 선비들이 추구하던 것은 검소하고 소박하고 자연 속에 묻혀 사는 삶이었다. 옛날 처사들은 다 가고 없지만 그들이 머물렀던 공간, 정자나 초당은 아직도 소박한 모습으로 그렇게 남아있다.
주말이면 쉬러 가는 소박한 시골집을 하나를 가지고 있다. 농가를 사서 고친 것이다. 늘 그 시골집에 당호를 새긴 편액을 하나 걸고 싶었다. 집 앞에 배 밭이 있다해서 농담으로 <李花莊>이라고 불러주는 친구도 있기는 하다. 그 평범한 시골집에 당호가 가당키나 하랴마는 당호라는 것이 꼭 큰 집에만 붙이라는 법은 없으니 언감생심 당호라는 것을 짓기는 했다. 그래도 약간은 고심 끝에 <笑閑齋>라는 이름을 지었다. 어찌 보면 너무 뻔한 듯해서 부끄럽기도 한데 그 유명한 이 백의 山中問答 가운데 笑而不答心自閑에서 소자와 한자를 따온 것이다. ‘그저 말없이 빙그레 웃으면 마음이 저절로 한가로운 집이고 싶다’는 나의 작은 소망을 담은 것이다.
도래마을 종가집 사랑채에 걸려있는 창암 이 삼만 선생의 글씨, <安分窩>는 대단한 절필이었다. 글씨도 그 뜻도 너무나 마음에 들어 똑같이 새겨 그 소한재 대청 마루 위에 걸어 두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처사를 꿈꾸는 사람은 나만이 아닌 것 같다. 지금 장관급인 문화재청장을 하고 있는 유홍준 교수의 서울 학동 집 이름은 수졸당(守拙堂)이다. 내가 아는 문 선생은 수빈지가(守貧之家)라는 현판을 걸어두고 산다. 내가 안분와라는 현판을 걸었다니까 내가 회원으로 활동하는 전원주택 카페의 한 분은 자기 집은 와려(蝸廬)라는 현판을 걸었단다. 蝸廬는 달팽이집이란 말이다. 옛 선비들이 자기 집을 낮추어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달팽이처럼 기어 들어가고 기어 나올 수 밖에 없는 초라한 집이란 의미 속에는 청렴 결백한 선비 정신이 깃들어 있다. 고창 선운사 경내에도 크기도 하고 화려하게 단청을 입힌 건물인데도 <靜窩>라는 현판이 걸려있었다. 고요한 움막집이란다. 며칠 전 골동품 가계에서 본 고색창연한 현판 방시한재(方是閑齋) 또한 가계 주인이 일러준 바로는 비슷한 뜻이라고 한다.
박사는 죽으면 지방에 현고박사부군신위라고 쓴다고 한다. 퇴계가 죽어서 명정에 처사라고 쓰여지기를 희망했듯이 나 또한 우리 시대의 마지막 처사로 남고 싶다. 나도 처사로 써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지방이나 명정에 무어라 쓰여 지느냐가 무어 그리 중요하겠는가? 그 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처사로 살아가는 맑은 삶이 아니겠는가?
'차 한잔의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규봉암이야 말로 無有等等, 그 경지(치)가 높고 빼어나 비할 데가 없더라 (0) 2005.11.20 복사꽃 피는 집을 꿈꾸며 (0) 2005.11.15 나의 꿈자리를 지키는 경호원들 이야기 (0) 2005.06.15 어느 아름다운 미술관 이야기 (0) 2005.06.07 '초여름 대청 마루가 보이는 뜨락에서' (0) 2005.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