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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꽃 피는 집을 꿈꾸며차 한잔의 단상 2005. 11. 15. 02:02
"저 복숭아 나무 뽑아 버리라니까~요" 아내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오래 전부터 몇 번이나 그 말을 해 온 터였기 때문이다.
소한재 마당에는 몇 그루의 나무가 자란다. 그 중에는 자두, 감, 복숭아, 석류, 매실, 앵두... 등 유실수도 있다. 아내 주변의 여러 사람들이 복숭아 나무는 귀신을 불러 들이고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나무라고 부채질한 모양이다. 한 그루라도 더 심지 못해 안달을 하는 나에게 애써 돈 주고 사다 심은 나무를 그것도 몇 년이나 키운 나무를 뽑아 내버리라니... 아까운 마음에 적당한 기회 봐서 집 밖으로 옮겨 심겠다고 얼버무리면서 지금껏 버텨 왔다.
흔히 신선들이 사는 곳, 동양적 유토피아는 늘 武陵桃源으로 그려지지 않던가? 우리나라 최고의 명화, <夢遊桃園圖> 또한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박 팽년과 함께 본 이상향, 복숭아 숲의 경치를 화가 안견에게 이야기하여 3일 만에 완성한 그림이 아니던가? 도원결의. 천하의 영웅호걸 유비, 관운장, 장비 셋이 모여 의형제의 결의를 맺은 현장 또한 복숭아 밭이 아니던가? 어렸을 적에 들은 옛날 이야기 속에서도 옥황상제가 사시는 천상의 궁궐 정원에는 언제나 천도 복숭아가 탐스럽게 열려있었다. 그런 복숭아가 왜 그렇게 불길한 나무라는 것인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 꽃 살구 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이 노래 가사처럼 복사 꽃이 없는 <고향의 봄>을 나는 상상하지 못한다.
아내의 성화가 있은 후 복숭아 나무를 바라 보는 내 마음 또한 편치 않았다. 집안에 두면 좋지 않다는 나무를 그대로 두고 있는 마음이 어찌 편하기만 하랴? 안 좋은 점 궤를 듣고 난 뒤의 찜찜함이 늘 내 마음 한 구석에 일렁이고 있었다. 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나무라는 그 죄 하나만으로도 당장 뽑아 버려 마땅한 나무일 터. ‘그래 뽑아 내버리더라도 이유나 제대로 알고 뽑자’고 인터넷에 찾아보았더니 ‘어라?’ 찾아보니 복숭아 나무는 오히려 아내의 말과는 정반대의 이유로 집안에 심지 않는 나무였다.
우선 복숭아 나무는 귀신을 불러들이는 나무가 아니라 귀신을 내쫓는 나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귀신 들린 사람을 무당이 복숭아 나무 가지로 그것도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 나무 가지를 꺽어 때리는 시늉을 한다. 같은 이유로 복숭아는 제사상에도 오르지 않는다. <흥부전>에도 놀부 마누라가 제사상 앞에 숯불을 피우고 복숭아를 궤놓는 장면이 나온다. 숯불과 복숭아는 혼백이나 귀신이 말만 들어도 도망가는 물건인데, 혼백을 부르는 제사상에 올려 놓아 조상에 대해 불효를 저지르는 것이다.
복숭아의 원산지인 중국에서는 복숭아 나무로 만든 도장 활 또는 막대기(회초리) 조차 그런 힘을 지닌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병마와 악귀를 쫓기 위해 새해에 복숭아 나무로 만든 인형을 대문에 달기도 한다.
또 복숭아 나무를 집안에 심으면 남자가 바람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바람을 피운다는 것이다. 그것은 복숭아 씨앗이 들어있는 속 모양 또한 여인의 자궁 모양과 흡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 듯 복숭아가 여성의 피부나 신체를 연상 시켜서 인지 서양에서는 에로틱한 표현과 관련된 경우가 적지 않다. 미국에서 "She is a peach"란 말은 여성에게 대한 최고의 극찬이다. 그저 아름다운 여자를 넘어 성적인 매력 까지 철철 넘치는 여자라는 뜻이다. 잘 익은 복숭아 하나를 보여주면서 ‘우리를 제발 그런 식으로만 생각하지 말아주십시오’라는 헤드라인을 달고 있는 잡지 <팬트 하우스>의 광고를 본 기억도 있다. 그 광고사진에서도 탐스러운 복숭아 모양이 벌거벗은 여자의 엉덩이 모습과 흡사하게 보이도록 처리되어 있었다. 복숭아가 에로틱한 서정으로 연결되는 것은 굳이 서양의 것만은 아니었다.
아, 너도 먼동이 트기 전으로
수밀도(水密塗)의 네 가슴에
이슬이 맺도록 달려오너라"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에 나오는 복숭아는 매우 관능적이다. 복숭아꽃을 뜻하는 桃花라는 이름도 에로틱하지 않은가. 그래서 여염집 규수 보다는 기녀의 이름으로 훨씬 어울려 보이지 않는가? 성적 욕망이 과하면 화를 입는다는 표현도 굳이 복숭아꽃을 갖다 붙여 도화살(桃花煞)이라 하지 않던가. 복숭아와 에로틱한 분위기가 맞물리면서 <울안의 도화가 담을 넘어가면 그 집 처녀가 바람이 난다>는 옛말도 생기지 않았나 싶다. 봄은 여자의 계절이고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다. 복사꽃이 만발하는 봄,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봄이면 여자, 특히 처녀 마음이 왜 설레지 않겠는가? 복사꽃 가지가 담 밖으로 넘어가면 담 밖 세상으로 향하는 처녀 마음 또한 그 가지를 따라 담을 넘지 않겠는가? 그만큼 춘정을 흔드는 감성적인 꽃나무라는 역설이 아닐까?
그 그림을 보기 위해 2주일 마다 화랑을 찾아가던 때가 있었다. 물감 대신 이 땅의 흙을 모아 그림을 그리던 최 영림 선생의 4호 짜리 소품이었다. 내가 스스로 <봄봄>이라는 화제를 붙여두고 늘 좋아했던 그 그림 속에도 복사꽃이 한창이었다. 아지랑이가 아롱아롱 피어오르는 대지, 복사꽃이 만발한 과수원. 그 흐드러지는 복사꽃 아래서 벌거벗은 두 남여가 하나로 뒤엉켜있다. 생명의 환희로 가득한 그 섹스를 녹색의 방울뱀이 지켜보고 있었다. 질펀한 섹스임에도 속기가 없다. 이 효석의 소설 속에서 만나는 자연 속에서의 섹스에서 느껴지는 건강한 생명감 그것과도 흡사했다.
고대 중국에서는 복숭아를 선과로서 장수의 상징으로 여겨 왔다. 장수를 기원하는 그림에 복숭아가 세 개 그려져 있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수령삼천세"라고 하는 의미로 서왕모 (곤륜산에 산다는 반인반수의 여자 신선) 의 고사에서 유래되었다. 이 고사에 의하면 천계에는 삼천 년에 한 번 꽃 피고, 삼천년에 한번 열매를 맺는 복숭아 나무가 있다고 한다. 또 서유기의 손오공은 먹으면 불노 불사한 다는 이 천계의 복숭아를 따먹은 죄로 삼장법사가 구해줄 때 까지 500년 동안 바위틈에 갖히는 벌을 받는다. 이 서왕모의 복숭아를 훔쳐먹은 동방삭은 삼천갑자년, 즉 18만년을 살았다고 한다.
동의보감을 보면 복숭아와 장수 전설은 단순히 꾸며낸 이야기도 아닌 듯 싶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복숭아나무는 그야말로 버릴 것 하나 없는 약재이다. 복사나무 잎, 꽃, 열매, 복숭아씨(桃仁), 말린 복숭아, 나무속껍질, 나무진을 비롯하여 심지어 복숭아 털, 복숭아벌레 까지 모두 약으로 쓰였다. 으스름 달밤에 복숭아를 먹는 것은 약이 되는 복숭아 벌레를 가장 쉽게 먹는 방법이다. 그래서 달밤에 복숭아를 먹으면 미인이 된다는 속언이 생긴 모양이다. 아무리 약이라지만 혹시 반 토막난 벌레를 생각할 수 있는 상상력을 가졌다면 먹기가 정말 끔찍하였을 것이다. 복숭아로 유명한 경북 청도 지방에서는 복숭아밭 집 딸은 미인이고, 외밭 집 딸은 약골이라는 말이 전해오는 걸 보면 복숭아가 미용에 좋다는 말이 영 허튼 말은 아닌 듯 싶다.
결국 알고 보니 복숭아는 저주의 나무가 아니라 축복의 나무였다. 일 주일에 하루 이틀 쉬러 가는 세컨드 하우스이니 제사 지낼 일이 없다. 그러니 귀신을 쫒는 것이 고마울지 언정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월선리의 예술인촌 촌장, 김 문호 선생의 말을 들으면 복숭아 나무에 벌레가 많이 꼬이는 것도 복숭아 나무 수액을 먹어야 해독이 되기 때문이란다. 아내는 첩실 허벅지를 꼬집 듯이 내가 모르게 가지를 꺽어놓곤 했단다. 그동안 미운 오리 대접을 받아온 우리 집 복숭아 나무가 알고 보니 고귀한 백조였는데.
문여하사서벽산(問余何事栖碧山) 소이부답심자한(笑而不答心自閑) 빙그레 웃으면 마음이 저절로 한가로워지는 집, 나의 <笑閑齋>는 또한 복사꽃 피는 집이고도 싶다. 도화유수묘연거(桃花流水杳然去)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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