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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忘 그리고 不忘(잊어야 할 것과 잊지 말아야할 것)
    차 한잔의 단상 2008. 9. 5. 08:57
     잊어야 할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하여

    - 영남과 호남, 안동과 광주에 관한 생각을 중심으로 -

     

     

    (註 : 다음은 신입생을 대상으로 한 <대학생활의 설계> 시간에 내가 한 특강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영남 출신으로서 그리고 안동 출신으로서 호남인들에게, 그리고 광주 사람들에게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들이다.)


     

    옛날에, 이제 회사를 그만두고 K대학교로 자리를 옮긴다고 말씀 드렸을 때 우리 집안의 가장 어른이었던 백씨 형님의 첫 마디는 “니 거 가 우예 살래?”였다. 경상도 사람인 내가 전라도 한 복판에 가서 어떻게 살 수 있겠느냐는 걱정이었다. 나는 경주 최씨. 신라를 세운 6부 촌장중 한 명인 소벌도리 공이 내 할아버지다. 핵심 신라 사람인 네가 적지, 백제 한 복판에 가서 어떻게 살겠느냐는 것이다. 영남과 호남 사이에는 마치 한국과 일본과 같은 지역 감정이 존재한다.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역사적 배경도 있고 박 정희, 전 두환, 노 태우, (노 무현)으로 이어지는 영남 출신이 계속 대통령과 정권을 독식하면서 그리고 정권 연장을 위해서 지역 감정을 부추기고 정치적으로 악용한 결과였다. 미국의 1/100, 러시아의 1/173, 중국의 1/44에 불과한 나라. 손바닥만한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지고 그것도 모자라 그 반쪽마저 동서로 또 갈라지고 있는 것이다. 한심한 일이다. 영호남 분열도 모자라 요즈음은 선거 때만 되면 경상도 당, 전라도 당, 충청도 당으로 나눠져서 싸운다.


    그 넓은 중국이 티벳의 독립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것을 보라. 중국은 수많은 나라들로부터 독립국으로 인정받고 있는 대만조차도 자국의 한 개의 성으로만 인정한다. 우리로 치면 수많은 도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는 지금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다. 몇 개의 분단국들이 있었지만 다 통일되고 지금은 우리 한반도만 분단국으로 남아있다.


    내가 구정이나 추석 때 고향을 갈 때 나는 영호남의 단절을 새삼 느낀다. 틀어놓은 라디오에서는 길이 막힌다고 난리인데 88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 내 차 앞에는 차 한 대가 없다. 백 미러를 쳐다봐도 따라오는 차 한 대가 없는 경우를 심심찮게 경험한다. 고속도로를 전세낸 느낌이다. “이렇게 까지 할 필요가 없는데... 나 고향 편하게 다녀오라고 도지사들이 너무 신경을 쓰는구만..” 이렇게 농담을 하지마는 씁쓸한 기분은 어쩔 수 없다.


    영남과 호남 사이에는 백두대간의 소백산맥이 그리고 우리나라의 어머니 산인 거대한 지리산이 그리고 섬진강이 가르고 막고 있다. 산 하나가 강 하나가 얼마나 넘고 건너기 어려운 벽인지를 새삼 느낀 적이 있다. 여행을 하고 있었는데 하동을 가면서 다리를 건너기 전에 길을 물어봤을 때는 완벽한 전라도 사투리로 대답이 돌아왔다. 다리 하나를 넘어 길을 물어 보았더니 이번에는 완벽한 경상도 사투리로 대답이 돌아왔다. 다리 하나 사이로 그렇게 완벽하게 말이 바뀐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고 경이로웠다. 그 만큼 강 하나가 산 하나가 깊고 높은 것이다.


    인정하고는 싶지 않지만 영호남간에는 뿌리 깊은 지역감정이 남아있다. 5. 18. 때도 경상도 출신 공수특전단을 술을 먹여서 진압 작전에 투입했다. 그래서 경상도 사람들이 전라도 사람들 다 죽인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유포되기도 했다. 내가 고향엘 가도 자주 전라도 사람들을 욕하는 소리를 듣는다. 광주에 갔는데 경상도 번호판이라고 기름을 넣어주지 않았다, 광주에 갔다가 해태와 롯데의 야구 시합을 보면서 롯데를 응원했다가 맞아 죽을 뻔 했다는 등. 수많은 이야기들이 사실 이상으로 입에서 입으로 회자되고 있다. 나는 지금도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면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김 대중 정권 때의 일인데 지방 뉴스를 듣는데 어처구니 없는 뉴스가 나왔다. 대구 경북의 시도의원 50여명이 오늘 광주에 온단다. 그 이유라는게 한심하게도 전라도 정권이 들어서서 전라도는 노가 나는데 경상도는 다 죽게 생겼다. 그러니 너희들이 가서 사실인지 눈으로 보고 오라는 것이다. 아니 5. 18. 때처럼 교통이나 통신이 두절되기를 했어... 인터넷이 없어? 전화가 없어?.... 이런 대낮에 이 무슨 코미디 같은 일이란 말인가? 그 언저리에 부산에 사는 처남댁이 그 때문에 우리 집으로 전화를 한 일도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과 이야기하다가 부산은 지금 다 죽게 생겼는데 지금 전라도나 광주는 노가 난다더라. 그래서 경상도 사람들이 먹고 살려고 전라도 공사판으로 보따리 싸가지고 다 간다더라. 처남댁이 우리 올케가 광주 사는데.. 그랬더니 사람들이 전화해서 그게 사실인지 물어보라고 난리를 부려서... 전화했다는 것이었다. 분명히 코미디 같은 일인데 선뜻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기(奇), 고(高), 박(朴). 전남 광주 일대에서 알아주는 성씨를 손꼽을 때 하는 말이다. 광주를 대표하는 성씨는 행주 기씨, 제주 고씨, 무슨 박씨, 소위 기고박이다. 광주 지방에서 기씨 집안이 명문으로 부상한 계기는 고봉 기 대승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났기 때문이다. 고씨 집안에서는 임진왜란 때 금산 전투에서 3부자가 함께 전사한 의병장, 제봉 고 경명을 배출했다. 박씨 집안에서는 학행으로 이름을 날린 눌재 박 상과 그의 동생인 육봉 박 우, 그리고 육봉의 아들로서 시인이자 영의정을 지낸 박 순을 배출했다.

    고 씨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제봉 고 경명이다. 제봉 선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남 의병을 일으켜 풍전등화와 누란의 위기에 빠진 조선을 위해 발 벗고 나섰다. 그는 두 아들(종후 & 인후)과 집안의 가노들 까지 데리고 전쟁터로 나갔다. 인삼으로 유명한 금산전투가 바로 그것이었다. 세 아들을 두었는데 대를 잇기 위해 그 중 막내 하나만을 남기고 전장으로 나갔다.


    집을 떠나면서 그는 어린 아들, 용후에게 이르기를 ‘가솔들을 데리고 안동으로 가라. 그리고 학봉 김 성일 선생 댁을 찾아가면 너를 보살펴 줄 것이다.’ 안동을 대표하는 인물은 누가 뭐라고 해도 퇴계 이 황, 서애 유 성룡, 학봉 김 성일이다. 좌 학봉, 우 서애라 할만큼 서애와 학봉 모두 퇴계의 수제자였다. 제봉고 학봉이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는 나의 천학비재로서는 알 수 없으나 학봉이 나주 목사를 지낸 적이 있다. 당시 호남에는 서원이 없었는데 학봉이 나주 나씨들의 지원을 받아 대곡서원을 세우기도 했다. 그 경현 서원에는 지금 학봉도 배향되어 있다. 아마 학봉이 나주 목사로 와있을 때 제봉과도 교류했던 듯 하다. 이렇게 집을 떠난 제봉은 금산전투에서 왜군을 맞아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를 한다. 데리고 나간 두 아들, 용후와 인후 그리고 가복, 봉이와 귀인도 모두 아비와 주인을 따라 전사 했다. 금산에 있는 칠백의총이 바로 그 때 죽은 호남 의병들의 합장묘다. 아버지의 지시대로 막내 용후는 아녀자를 포함하여 50여명에 달하는 가솔들을 데리고 안동 학봉 선생 댁을 찾아간다. 이 때 학봉 선생도 전장으로 나가고 학봉 가족들은 임하의 납실이라는 곳에 피난중이라 산나물로 죽을 끓여 연명을 하면서도 학봉의 장남, 애경당 김 집은 이들과 동거동락했다. 또한 고 경명과 그의 두 아들을 포함한 700의사가 모두 금산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는 비보를 접하고는 상주가 된 고 용후가 예법에 맞게 장례를 치르도록 도와주고 정성껏 보살펴 주었다. 고 용후는 가솔들과 함께 학봉 집에서 3-4년쯤 머물다가 전라도로 돌아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용후는 학봉 집에 머물 때 당시 학봉의 손자인 김 시권과 같이 상을 당한 처지이고 거의 동년배라서 서로 격려하면서 함께 공부했는데 이들은 1605년 서울 과거 시험장에서 반갑게 해후했다. 고용후는 생원과의 장원으로, 김 시권은 동방으로 진사 급제를 했다. 그 후 10년이 지난 1617년, 안동부사로 부임한 고 용후는 파발마를 보내 학봉 선생의 노부인과 장자 김 집을 안동 관아로 초대하여 크게 잔치를 베풀었다. 잔칫날 고 용후는 오늘 날 소생이 영광이 있는 것은 후덕하신 태부인과 애경당의 20년 전 은혜 덕택입니다. 두 분의 은덕이 아니었더라면 어찌 오늘이 있겠습니까?하고 울면서 큰 절을 올렸다고 한다. 비슷한 연배의 고 용후와 김시추, 김 시권 형제는 그후로도 계속해서 친형제처럼 서로 돕고 의지하면서 지냈다. 실로 영호남간의 이념적 동지들 사이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조 용헌 교수의 500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중에서)


    거기서 임진왜란이 끝날 때 까지 약 2년 정도를 안동에서 지내게 된다. 제봉의 막내, 용후는 학봉의 손자, 아무개와 나이가 비슷해 함께 공부를 했는데 그 두 사람은 한 날 한 시에 소과에 나란히 합격을 한다. 그러나 대과는 용후가 몇 해 먼저 합격을 해 안동 부사로 오게된다. 안동 부사로 부임한 용후는 학봉의 부인이었던 대부인을 안동부로 초청해 사은의 잔치를 크게 베풀기도 했다. 용후는 대부인에게 엎드려 잔을 올리며 ‘대부인이 아니었었으면 어찌 오늘의 제가 있을 수 있겠나이까?’라면서 큰 절을 올렸다고 한다. 학봉 선생 또한 진주성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를 한다. 좀 심하게 말하면 광주를 대표하는 고씨 집안은 안동의 학봉 집안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까지 이어져 올 수 없었을런지도 모른다.


    오랫 동안 전쟁을 준비해 승리를 확신했던 일본이 7년이나 끌면서도 결국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데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두 가지 변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하나는 이 순신이라는 걸출한 조선 장수의 존재를 알 지 못했기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전국적으로 들고 일어난 조선 의병들이었다. (임진왜란시의 의병의 활동 조사해볼 것) 인구 비율로 볼 때 전국에서 가장 많은 항일지사를 배출한 곳이 바로 안동이다. 내앞 김씨 문중에서만 건국훈장을 받은 이가 27명이다. 이중 학봉 후손만 11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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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안동의 최고 어른이자 이 나라 최고의 성리학자였던 퇴계, 이 황과 광주의 대표적인 학자였던 고봉 기 대승 간의 교류의 역사도 너무나 유명하다. 고봉과 퇴계는 나이 차가 무려 스물 여섯살이나 난다. 당시 퇴계는 조정의 원로이자 최고의 학자였고 고봉은 이제 대과에 막 급제한 햇병아리 신진 관료였다. 장유유서의 나라 조선에서는 한 자리에 마주 앉을 수도 없는 사이였다. 그러나 군자는 군자를 한 눈에 알아보는 듯 둘은 첫 눈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존경하는 선배와 사랑하는 후배로서 각별한 정을 나누었다. 퇴계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삼수나 해서 붙은 과거였지만 난정에 염증을 느껴 무려 스물 한번이나 사표를 내고 안동으로 돌아온다. 퇴계의 고향은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다. 윤 원형의 소륜과 윤 임의 대륜... 임금의 외척들이 발호와 부패... 당시 윤 원형의 집에 쌓인 고기 썩는 냄새로 코를 막고 지나가야 했을 정도라고 하니 당시의 부패상이 어떠했는 지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조정에 대해 퇴계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저항은 사직을 청하고 낙향하는 것 뿐이었다. 토계의 토를 물러날 퇴로 고치고 호로 삼은 것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그의 의지의 표현이었다. 지금도 광주에서 안동을 가려면 자가용으로도 6시간 정도는 잡아야 한다. 우편배달부도 없었던 당시로서는 걸어가는데 이 삼주는 족히 걸렸을 것이다. 처음 만난 다음부터 퇴계가 죽을 때 까지 무려 13년 동안 고봉 기 대승과 퇴게 이 황은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치열하게 학문적 논쟁을 벌인다. 상대방에게 깍듯하게 예를 다하면서도 학문적 토론에 있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그 두 사람이 13년 동안 주고 받았던 편지는 지금 고봉 퇴계에게 편지를 쓰다라는 제목으로 두툼한 두께의 책으로 나와있다. 이 13년간의 논쟁을 통해서 대학자 퇴게는 후학 고봉 기대승의 주장을 받아들여 자기 이론의 일부를 수정하기 까지 한다. 퇴계가 안동으로 떠나는 날, 한 강 까지 배웅을 나온 고봉이 퇴계를 떠나보내고 섬섭한 마음과 애절한 마음을 담은 시를 읽은 적이 있다. 아버지 이상으로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그대로 읽혀졌다.

    퇴계는 조정을 물러나면서도 인물을 천거해달라는 임금의 요청에 바로 고봉 기 대승을 추천하기도 했고 자기 아버지 비문을 고봉에게 부탁하기도 했다. 퇴계가 고봉을 얼마나 아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보통 비문은 망인을 존경하는 후배나 그를 잘 아는 선배나 친구가 쓴다. 그게 상례다. 그런데 퇴계 묘 앞에 서있는 비문은 퇴계 자신이 직접 쓴 것이다. 퇴계가 자기 비문을 직접 쓴 것도 따지고 보면 고봉 때문이었다. 퇴계가 죽고 나면 고봉이 그의 비문을 쓰게 될 것은 불문가지. 그렇게 되면 존경하는 마음이 지나쳐 자신의 행적을 침소봉대할 것을 경계한 퇴계가 스스로 퇴도만은이공지묘라는 소박한 비문을 스스로 준비한 것이었다.


    이런 망국적인 지역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역대 정권들이 기회 있을 때 마다 거창한 이벤트를 벌였다. 지리산 천황봉에 올라가 낙동강물과 영산강물을 함께 붓는 합수제를 지낸다든지.... 거의 정권적 차원에서 대중가요를 띄운다든지... 조 영남이 부르는 노래, <화개장터>는 정부가 만든 히트곡적인 성격이 짙다. 화개장터는 전라도 구례 사람, 광양 사람, 경상도 산청 사람, 하동 사람이 모여 정을 주고 받던 장터이다. 그 화개 장터 앞에 섬진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남도 대교다. 전라남도와 경상남도를 잇는 다리라 해서 이름도 남도대교라 붙였다. 그리고 그 다리 개통식 때도 영호남 화합 잔치 한마당을 열었다. 그래서 영호남이 화합이 되었던가? 다리나 그런 이벤트가 영남과 호남을 화합 시켜줄 것이라고 나는 믿지 않는다.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그런 일회성 이벤트가 얼마나 효과가 있겠는가? 다리는 물리적 화합은 가능하게 해주겠지만 화학적 화합은 교육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잘못된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안동을 대표하는 두 인물, 퇴계와 학봉, 광주를 대표하는 두 인물, 고봉과 제봉... 이 네 사람, 이 네 집안의 우정과 애정의 교류의 역사는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었다. 이런 안동과 광주의 아름다운 교류의 역사가 영호남인들에게 알려지고 자꾸 자꾸 확대 재생산되어야 한다. 안동과 광주가 자매 결연을 맺어 이러한 전통을 현대적으로 승계하는 방법을 모색해 보는 것도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나는 안동에서 지내는 학봉의 제사에 광주의 제봉 집안에서 제사에 참례하는 지가 늘 궁금했다. 300년 전의 그 아름다운 교류의 역사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는 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제봉 종가가 그리 멀지 않은 지라 가끔 들렀는데 어느날 우연히 제봉 종가의 종부를 만났다. 그래서 오랫 동안 궁금했던 그것을 물어보았다. “혹시 학봉 선생 제사에 제봉 선생 집안에서도 누가 참례를 하러 가는지요?” 나는 곧 나의 질문을 후회했다. “학봉 선생요? 누구죠?” 전혀 뜻 밖의 대답이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충격적이었다. 제봉 종가를 방문하고 불과 며칠 뒤 나는 안동의 학봉 종가를 방문하게 되었다. 미리 계획된 일은 아니었고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었다. 나는 학봉 종가에서도 학봉과 제봉 선생 간의 우정에 대해 물어보았다. 학봉 종가에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자료를 꺼내서 보여주기도 했다. 나에게 자세하게 그 이야기를 들려준 학봉 문중의 인사는 내게 뜰에 심어진 나무 하나를 보여주었다. 고 아무개 장군의 기념 식수 표석이 놓여있었다. 어느 날 육군 준장이 학봉 종가를 찾아왔다. 우연히 지나다가 그 유명한 학봉 종가라고 해서 들렀다는 것이었다. 삼백년 전의 두집안 간의 아름다운 교류의 역사를 이야기해주었단다. 그리고 뜰에 나무 한 그루를 심어주고 갈 것을 부탁했다는 것이다.


    내가 존경하는 우리 학교 고 김 인곤 이사장님의 평생의 좌우명은 二忘不一忘 - ‘두 가지는 (빨리) 잊어 버려라. 그러나 한 가지는 (절대로) 잊지 말라’였다. 빨리 잊어버려야 할 두 가지는 누가 내게 잘 못 했던 거와 내가 누구에게 잘해 주었던 거. 누가 내게 잘 못 했던 거 기억해 봐야 원한만 쌓인다. 내가 누구에게 잘해 줬던 것도 기억하면 섭섭한 마음만 쌓인다. 그 두 가지는 빨리 잊어버리는 게 좋다. 하지만 내가 어려울 때 누가 나를 도와주었던 것. 그 은혜, 그 고마움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도움을 베푼 사람은 잊어도 된다. 하지만 도움을 받은 사람은 잊어서는 안된다.


    도움을 베푼 사람은 잊어도 된다. 하지만 도움을 받은 사람은 잊어서는 안된다. 이 사실을 생각할 때 마다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터키와 한국의 우정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터키 사람들은 우리나라를 형제의 나라로 생각한다. 터어키 국민들은 한국인들을 형제로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터키 국민들을 그렇게 각별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몇 몇 사람들이 그저 6.25 참전 16개국 중 하나로 우리가 어려웠을 때 도와준 나라 정도로 생각하는 정도가 고작이다. 터키의 한 장관이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자기가 터키에서 왔다고 하면 대단한 환영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을 만난 한국인들의 반응은 너무나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전혀 호의적이지도 않았으며 심지어는 터키가 어디에 붙어있는 나라인지도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돌아가 터키 신문에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고 한다. <이제 더 이상, 짝사랑하지 맙시다> 터키 국민들은 누구나 한국을 형제의 나라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그것은 그 사실을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서부터 반복적으로 가르치기 때문이다. 왜 터키가 한국을 형제의 나라라고 가르키는 것일까?


    돌궐을 기억하는가? 국사 시간에 고대사를 배울 때 돌궐에 대해서 잠간 들은 기억이 있다. 그 돌권이 지금의 터키의 조상이다. 세계사 시간에 배운 오스만 트루크 제국을 세운 것은 바로 그 돌궐이었다. 우리가 고구려의 역사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듯이 터키인들은 대제국 오스만 투르크의 역사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 오스만 투르크를 세운 돌궐은 그들의 위대한 그리고 자랑스러운 조상인 것이다. 그 돌궐은 고구려와 오랫동안 동맹국이었다. 서로가 돕는 형제의 나라였다. 그 돌궐의 형제의 나라, 고구려는 고려를 거쳐 오늘날의 코리아. 대한민국이다. 그 자랑스러운 역사를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때부터 반복해서 가르키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터키 국민들은 누구나 오스만 투루크와 함께 형제의 나라, 고구려, 코리아를 가슴에 새기는 것이다. 그들이 한국전쟁때 미국 다음으로 많은 15000여명의 군인을 보내준 것도 바로 그것, 코리아는 형제의 나라이기 때문이었다. 원래 터어키는 5천명 정도를 파병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형제의 나라 한국을 돕겠다고 자원한 터어키의 청년이 무려 15000여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 교과서는 고대사에서 돌궐에 대한 내용은 한 두 줄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돌궐과 고구려가 형제의 나라였다는 사실은 전혀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니 한국인들이 터키를 잘 모르는 것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정작 우리가 어려웠을 때 우리를 도와주었던 터키는 그 사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데 도움을 받았던 우리는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한국과 터미의 짝사랑과 서운한 감정을 일시에 뒤집어 엎은 감동적인 드라머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이었다. 그 월드컵에서 한국도 그랬지만 터어키도 예상 이외의 선전을 거듭하면서 돌풍을 일으키면서 4강에 진출했다. 처음에 터어키의 경기가 한국에서 열렸을 때 객석은 텅 비어있었다. 한국인들은 터키 경기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다른 나라를 응원하기도 했다. 이런 사실이 보도를 타고 터키에 전해 지면서 터키 국민들은 섭섭함을 넘어 분노했다. ‘아니 형제의 나라, 한국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터키인들의 섭섭한 감정이 유학생들이나 교민들의 입을 통해 인터넷에 올려짐으로써 그 사실이 거꾸로 한국에도 알려지면서 반성의 소리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언론들도 터키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한국인들이 터키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그 응원 덕이었는지 터키와 한국은 돌풍의 두 주인공으로 떠오르면서 급기야는 4강 신화의 기적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준결승전에서 나란히 패배한 터키와 한국은 3-4위전에서 맞붙게 된다. 한국인들이나 터키인들이나 다 자기 나라가 이기기를 원하지만 그러나 설사 진다고 하더라도 괜찮다는 분위기였다. 둘 다 4강에 오른 것만 하더라도 충분하다는 것이었고 더구나 그 상대가 형제의 나라, 터키고 한국이고 보면 설령 지더라도 별로 섭섭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래도 터키 국민들 생각에는 그래도 한국에서 벌어지는 3-4위 전이고 보니 한국인들의 일방적인 응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나라와 터키가 싸운다면 당연히 한국인들이 터키를 응원해 주겠지만 자국인 한국과 터키가 맞붙는 경기인 만큼 한국인들이 한국을 일방적으로 응원하는 것을 뭐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터키인들의 그런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한국과 터키의 3-4위전 스타디움을 메운 관중은 정확하게 반으로 나뉘었다. 한국인 관중의 반이 터키 응원단이었다. 경기가 시작되고 양국의 국가가 연주될 때 태극기와 똑같은 크기의 초대형 터키 국기가 완전히 관중석을 덮으면서 펼쳐졌다. 이 광경을 지켜본 터키 국민들은 감동의 도가니탕 그대로였다. 한국과 터키의 3-4위전은 전쟁이 아니라 완전한 한편의 우정의 축제 한 판이었다. 터키가 3위 한국이 4위. 경기 종료를 알리는 주심의 휘쓸과 동시에 최선을 다한 한국과 터키 선수들은 달려가 얼싸 안았다. 그리고 양국의 전선수가 어깨 동무를 하고 양국의 응원단을 찾아 감사의 경례를 바쳤다. 이 경기 상황을 티비를 통해 지켜본 터키 국민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역시 한국은 형제의 나라였던 것이다. 월드컵이 끝난 다음 한국의 이 을룡 선수는 터키팀으로 이적했다. 터키에서 이 을룡 선수가 대단한 환영을 받았음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폴란드의 아우슈비추 수용소 벽에는 죽어가면서 벽에 남긴 어느 유태인의 낙서가 남아있다고 한다. “Forgive Them. But Never Forget It.” (그들을 용서하라. 그러나 결코 잊지는 말라.)


    우리는 너무 잘 잊어버린다. 망각의 강, 레테를 너무 자주 건넌다. 삼풍 백화점 붕괴 사건이나 성수대교 붕괴 사고니... 대형사고가 터질 때 마다 온 나라가 냄비 끓듯 난리를 피우다가도 몇 달만 지나고 나면 완전히 없었던 사건이 되고 만다. 아무리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라지만 절대로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다. 과거사에 대해 한국은 끊임없이 일본의 사과를 요구한다. 과거가 미래를 발목 잡아서는 안된다는 목소리도 있다. 우리 또한 아우슈비츠 수용소 벽에 선명하게 남아있다는 어느 유태인의 절규를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어려웠을 때 도움을 주었던 나라나 사람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영호남 화합을 위해서도 신라와 백제의 역사나 경상도 정권의 독식... 이런 것들은 빨리 잊어버려야 한다. 그리고 학봉과 제봉, 퇴계와 고봉 간의 아름다운 교류의 역사는 기억해야 한다. 가해자가 잊지 않고 있는데 피해자가 잊자고 말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한국은 터키를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망각의 레테강 가에서



    한강수는 넘실넘실 밤낮으로 흐르니

    떠나시는 우리 선생, 어이하면 붙잡으리

    모랫가에 닻줄 끌고 못 떠나게 배회할 제

    밀려오는 애간장 시름을 어이 할까나?


    퇴계와 벌인 사단칠정 논쟁

    사단(인의 측은지심, 의의 수오지심, 예의 사양지심, 지의 시비지심)은 선한 마음의 이성을 가르키고 칠정(인간의 일곱가지 감정, 희노애락애오욕)은 인간의 본능적 감정을 가리킨다. 퇴계는 사단이 理에서 발생하고 칠정은 氣에서 발생한다고 보았다. 즉 사단과 칠정, 즉 理와 氣를 서로 혼합시킬 수 없고 따로 분리시켜 보려는 입장이다. 퇴계는 理氣二元論의 성리학자였던 반면 고봉은 양자를 떼어놓고 볼 수 없다는 반론을 폈다. 이른바 理氣互發說이 그것이다. 퇴계가 이와 기를 분리하려고 한 이유는 이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사단칠정론이란 인성론에서 인간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네 가지 마음씨, 즉 인의예지와 인간의 일곱가지 감정, 즉 희로애락애오욕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설명하는 것인데 퇴계는 주자 이래의 학설에 따라 산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고봉은 여기에 문제 제기를 하여 장장 8년간 왕복 서한으로 이루어진 논쟁 끝에 자기 설을 수정하여 사단은 이기 발현하여 기가 거기에 따르는 것이요(理發氣隨之) 칠정은 기가 발현하고 이가 거기에 올라타는 것(氣發理乘之)라고 겨론 지었다.


    퇴계와 고봉의 8년간의 논쟁은 그 논쟁의 결과 보다 그 논쟁의 방식과 태도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운다. 무려 26년 연하의 후배, 고봉과 논쟁을 하면서 제자의 지적에 의거해 학설을 수정하는 퇴계의 자세는 정말로 위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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