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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관 조선서화대전노변정담(爐邊情談) 2008. 10. 13. 01:52
간송 전 형필 선생이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박물관인 이 <보화각>을 설립한 지 올해로 70년.
그 기념으로 올해는 조선서화대전을 준비했다.
좀 심하게 말하면 내가 간송미술관에 달려간 것은 추사의 이 <명선>, 두 글자를 보기 위해서라고 말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해남 대둔사 성보박물관에서도 내가 가장 보고 싶었던 것은 이 두 자였는데 당연히 거기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거기 없었다. 절 안에 있는 찻집에서 이 글씨를 찍은 다포는 팔고 있었지만 추사의 이 족자는 대흥사에 없었다. 광주에서 유명한 한정식집, <명선헌>의 안주인이 간송미술관에 있다고 일러주고서야 비로소 그 소재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간송미술관은 봄 가을로 보름씩 일년에 딱 두 번만 문을 연다. 설령 그 때 미술관을 찾는다고 해도 이 것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마침 올 가을은 전시 테마가 서화대전으로 잡혔기에 이 것을 직접 볼 수 있게 되었으니 망정이지.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명선, (차를 마시며 선정에 들다)이 족자는 추사가 대흥사 일지암의 초의선사로 부터 차 선물을 받고 답례로 보내준 것이다. 옆에 쓰여져 있는 그의 행서 발문을 보면 "초의가 스스로 만든 차를 보내왔는데 (중국의) 몽정(차)과 노아(차)에 조금도 못하지 않다. 이 것을 글씨를 써서 보답하는데 <백석신군비>의 필의로 쓰다. 병거사(김 정희)가 예서로 쓰다."
어떤 사연으로 대흥사에 있어야할 이 글씨가 간송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이 두 자 앞에서 티벳인들이 달라이 라마를 친견했을 때의 경외를 느낀다.
화법에는 장강 만리가 들어있고 서세는 외로운 소 나무 한 가지와 같다.
추사의 서화론이 이 예서 대련에 압축되어 있는 것 같다.
이 글씨야 말로 외로운 소 나무 한 가지 같지 아니한가?
여기서는 승련노인이라는 호를 쓰고 있다. 추사, 완당, 병거사, 노과, 승련노인... 등
추사의 호는 많기도 많다.
대팽두부과강채 고회부처아녀손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 딸 손자.
할머니가 임금의 딸, 옹주였던 추사.
태어나면서 부터 은 숫갈을 입에 물고 태어났던 추사가 마지막에서야 깨달은 것은 소박한 나물 반찬에 밥상에 둘러 앉은 가족애라니.... 칠십 한살의 과천인으로 되어있는 것을 보면 이 예서 대련도 추사의 말년 글씨이다.
이 글씨를 볼 때 마다 추사의 글씨가 그의 인생 역정과 너무나 흡사하게 닮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소위 그가 잘 나갈 때 그의 글씨에는 기름기가 가득하다. 그러나 제주도 대정현에서의 십 년 유배 생활과 해배 후 과천에 머물면서 죽기 까지의 쓸쓸한 그의 삶. 그 때 쓴 그의 글씨에는 번지르르하던 기름기가 쏙 빠지고 유 홍준 교수의 표현대로 안돈 건진 국수 같이 그저 담백하다. 그의 행서 대련처럼 말년의 그의 글씨에는 외로운 소나무 한 가지 같다.
혜원 신 윤복의 미인도.
당시 서울 상류사회의 세련된 풍류생활을 격조 높게 묘사했던 혜원. 이 미인도는 바로 그런 서울의 풍류생활을 주도하던 어떤 아리따운 여인의 초상화다. 당시 사회제도상 여염집 규수가 외간 남자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으니 이 미인도의 주인공은은 필시 풍류세계에 몸담고 있었던 기생이었을 것이다. 가채를 사용한 듯 탐스러운 머리에 젖가슴이 드러날 만큼 기장이 극도로 짧아지고 소매통이 팔뚝에 붙을 만큼 좁아진 저고리를 입고 속에 무지개 치마를 받쳐 입어 열두폭 치마가 풍만하게 부풀어 오른 차림새는 여체의 관능미를 유감없이 드러내는 자태인데 쪽빛 큰 치마 밑으로 살짝 드러낸 외씨같이 하이얀 버선발과 왼쪽 겨드랑이 근처에서 흘러내린 두 가닥 주홍색 허리끈은 일부러 고를 매지 않고 풀어헤친 진자주 옷고름과 함께 대장주를 뇌쇄시키기에 충분한 표현이다.
저고리 깃과 겨드랑이는 옷고름과 같은 진자주 빛으로 회장을 대고 끝동은 치마와 같은 쪽빛으로 회장을 대어 삼회장으로 멋을 부린 것도 도회적인 세련된 옷차림이라 하겠다. 두 손으로 묵직한 마모 노리개를 만지작 거리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 고혹적인 작태인데 여린 듯 애띤 둥근 얼굴에 열망을 가득 담은 채 물로른 앵두 처럼 터질 듯 붉게 부푼 입수이 말 할 듯 아니하며 맑고 그윽한 눈빛은 그리움으로 가득차 있다.
이는 분명히 혜원이 이 여인의 내밀한 속마음 까지 세세히 읽어내어 그것을 그림으로 표출해 내었을 때 가능한 표현이라고 하겠으니, 초상화를 전신(傳神)이라 한 이유가 여기 있었던가 보다. 그래서 혜원은 이런 제화시를 겯들이고 있다.
'화가의 마음 속에 만가지 봄 기운이 일어나니 붓끝은 능히 만물의 초상화를 그려내 준다.'
(작품 해설 중에서)
이 게 당시 최고의 세련된 포르노였다니.... ㅋㅋㅋㅋ
안평대군, 석봉, 한 호,정명공주, 공재 윤 두서, 겸재 정 선, 영조, 원교 이 광사, 표암 강 세황, 혜경궁 홍씨, 긍재 김 득신, 혜원 신 윤복, 다산 정 약용, 한수 신 위, 이재 권 돈인, 추사 김 정희, 소치 허 유, 석파 이 하응... 국사나 미술시간에 익히 들은 인물들의 서화를 직접 만날 수 있다니.. 보통의 안복이 아니다.
미술관이 가까와 졌을 때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나는 정차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인 줄 알았다. 물어봤더니 미술관에 들어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세상에나! 아니 언제 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렇게 고미술에 관심이 많았단 말인가? 알고보니 혜원과 단원의 일대기를 그린 드라머, <바람의 화원> 때문이라고 한다. 웃어야할 지 울어야할 지.. 표정 관리가 잘 안된다.
미술관에 들어가기 까지 한 시간 남짓. 들어가서도 혜원의 그림을 보기 위해서는 또 30분을 기다려야 했다.
역시 미술관은 너무나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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