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茶煙 속에서(윤오영)
    수필 감상 2020. 9. 30. 08:16

    카알라일과 에머슨이 처음 만나 인사한 뒤 한 삼십분 앉았다가 "오늘은 재미있게 놀았습니다"하고 헤어졌다.

    한 없이 부러운 이야기다. 

    백아가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가 무릎을 어루만지며 "아아(峨)한지고 태산이구나!"

    또 한 곡을 타면 "양양(洋洋)한지고 대양(大洋)이구나!"하며 찬탄하던 종자기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줄을 끊고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 

    눈물겨운 이야기다. 

     

    만났다 헤어지는 것을 인생 최대의 상심사라 했다. 그러나 저마다 만나는 것이 아니거늘 천재일우로 만난 지기를 중도에 영원히 이별하는 그 심곡은 예사로 추측할 길이 없다. 카알라일의 묵교(默交), 백아의 절현(絶絃) 그들의 그윽한 자취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봉(鳳)이 황(凰)을 구하는 것만이 짝을 구함이 아니다. 가을밤의 미충(微蟲)들도 짝을 구한다. 크고 작음은 다르나 애절함은 같다. 

     

    동성간의 사랑은 그 같음을 위함이요 이성간의 사랑은 그 다름에 끌리는 것이다. 다름은 혹 있을 지나 같음은 실로 어렵다. 그러기에 백년을 해로하는 부부는 많아도 일생을 같이 하는 친구는 드물다.

     

    어느 날 저녁, 어느 술집 골목을 지날 때 웬 친구가 내 등을 탁치며, "야 이 자식 참 반갑다. 한 잔 하자"하기에 쳐다보니 생면부지의 사람이다. 사람을 잘못 본 것이다. 그도 미안한 듯 사과하기에 바빴다. 나는 웃으며 그의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의 경솔을 책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반가운 친구를 헛짚고 혼자 가는 그 뒷 모습이 한없이 고적해보였다. 속으로 그가 꼭 그의 친구를 만나서 이 밤을 유쾌하게 보내주기를 빌었다. 그리고 한갓 술꾼이나 무뢰한이 아니었기를.

     

    생각하면 친구와 술 한 잔 나누고 차 한 잔 드는 것도 적지 아니한 분복(分福) 타고난 복이다. 어디 주정(酒情)과 다취(茶趣)를 함께할 친구가 그리 쉬운가. 있다해도 계제(階梯)를 얻기가 또한 어렵다. 내 몇 사람 안되는 친구 중에 술을 못하는 이가 있다. 술하는 친구를 만났을 때는 내 주머니가 비어 있었고 돈을 쥐고 한 잔 하고 싶을 때는 친구가 오지 않았다. 친구가 끌 때는 내가 시간이 없었고 혹은 만나기로 했다가도 불의의 일로 허사가 되는 일도 있다. 심상한 한 잔 술인들 어찌 분복이 아니랴.

     

    술은 대포집에서, 차는 다방에서. 나는 드디어 이렇게 달관해버렸다. 대포집에서는 친구 없이도 와글와글하는 속에 섞여서 너나 없이 취할 수가 있다. 젊은 주모에게 실없는 농을 던져 공백을 웃음으로 메우는 수도 있다. 다방에서는 자욱한 담배 연기, 울려오는 음향, 젊은 마담과 어린 레지들의 색다른 모습들이 서로 구경거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혼자 대포집에 들어서는 일은 없다. 첫째, 긴 시간을 소화할 곳이 못된다. 그래서 항상 길가 다방을 택한다. 차 맛은 묻지도 않는다. 오래 앉을 곳을 택한다. 차야 붕어 물 마시듯, 그리고 도룡용 안개 피우 듯 담배를 피운다. 몽롱한 다연 속에서 아는 얼굴을 만나면 횡설수설 잡담으로 시간을 소화하기가 예사다. 때로는 고궁으로 걸음을 옮겨 군왕이 전좌하시던 옥좌 앞을 제법 거닐어 보기도 한다. 요새 내 살아가는 벌이 길이 마치 북청 물장수와 같아서, 아침 저녁 뿐으로 이런 분복도 누리어 보는 것이다. 

     

    어제는 사람 그려 다방에서 놀았노라

    오늘은 외롭고져 덕수궁에 와있구나

    오가는 그윽한 심정 구름발에 날려라

     

    떠들다 일어서니 무엇이 남았던고

    가로수 성긴 잎은 노을에 물들었다. 

    뜬구름 바라보다가 그림자와 가노라

     

     

     

     

     

    '수필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록예찬(이양하)  (0) 2022.02.08
    폭포와 분수(이 어령)  (0) 2011.05.17
    오월(피 천득)  (0) 2010.07.01
    설해목(법정)  (0) 2010.03.22
    지조론(조지훈)  (0) 2010.01.01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