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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영혼의 목욕탕, 마음을 씻는 세탁소차 한잔의 단상 2006. 1. 17. 11:14
영혼의 목욕탕, 마음의 세탁소
산더미 같이 쌓여진 그릇을 씻기 위해 개수대 앞에 섰다
밥공기들을 하나하나 '퐁퐁'을 묻혀 닦아내려다가
문득 씻지도 않고 쓰는 마음이 손바닥에 만져졌다
먹기 위해 쓰이는 그릇이나, 살기위해 먹는 마음이나
한번 쓰고 나면 씻어두어야
다음을 위해 쓸 수 있는 것이라 싶었다.
그러나 물만 마시고도 씻어두는 유리컵만도 못한 내 마음은
더렵혀지고 때 묻어 무엇 하나 담을 수가 없다
금이 가고 얼룩진 영혼의 슬픈 그릇이여,.....
깨어지고 이가 빠져 쓸데가 없는 듯한 그릇을 골라내면서
마음도 이와 같이 가려낼 것은 가려내서
담아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 한다
누룽지가 붙어서 좀처럼 씻어지지 않는 솥을 씻는다.
미움이 마음에 눌어 붙으면
이처럼 닦아내기 어려울까?
닦으면 닦을수록 윤이 나는 주전자를 보면서
씻으면 씻을수록 반짝이는 찾잔을 보면서
영혼도 이와 같이 닦으면 닦을수록
윤이 나게 할 수는 없는 일일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릇은 한번만 써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뼈 속까지 씻으려 들면서
세상을 수 십 년을 살면서도
마음 한번 비우지 못해
청청히 흐르는 물을 보아도
때 묻은 정을 씻을 수가 없구나
남의 티는 그리도 잘 보면서도
제 가슴 하나 헹구지도 못하면서
오늘도 아침저녁을 종종 걸음 치며
죄 없는 냄비의 얼굴만 닦고 닦는 것이다
- 송유미 님 : 냄비의 얼굴은 반짝인다 전문 -
인터넷에 찾아낸 글이다. 참으로 맛 깔나게도 썼다. 목욕탕과 온천에다 요즈음은 스파다 워터 파크다.. 더럽혀진 몸이야 씻을 데가 많기도 많더라만 이렇게 세상에 더렵혀진 마음을 씻기 위해서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나? 산사는 마음을 씻고 마음을 여는 곳이다. 산사는 세속의 번뇌를 씻어버리는 깨우침의 공간이다. 그런 연유로 사람들은 절을 찾는다.
검푸른 산그늘에 휩싸여 긴 그림자를 드리우는 저녁 산사의 적요 속에 있을 때나 조각달이 처마 끝에 떨고 있는 신새벽 스님의 도량석 염불을 듣고 있노라면, 산사는 일찍이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한 우주의 숨결 까지 깨닫게 해준다. 또 꽃 피고 눈 내리고 소낙비 쏟아지는 산사의 사계는 어떤가? 그 속에 앉아 있으면 세상의 모든 번뇌와 시름은 사라져 버리고 영혼까지도 맑아지는 느낌이다. (이 형권의 산사 머리말 중에서)
나는 지금 송광사를 찾아간다. 세파에 찌든 눈과 마음을 씻으러... 우화각과 임경당이 말간 물 속에 물구나무를 서는 징검 다리에 서서 그리고 보조국사 사리탑이 서있는 언덕에 앉아 끝없이 이어지는 기와지붕의 추녀선이 파도처럼 넘실대는 풍경을 보면서 나는 눈을 씻는다. 그리고 불일암이나 부도암 가는 길의 편백이나 대 숲에 이는 바람에 세파에 찌든 내 머리를 감는다. 또 탑전의 출입문인 구산선문을 지나고 세월각과 척주당을 들르면서 마음의 때를 씻어낸다.
청량각을 건너기 직전에 새로 길이 났다. 건너 편 구 길이 자동차를 위한 길이고 새 길은 걸어 들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길이다. 이 길을 위해 새로 다리를 몇 개 놓았는데 솜씨가 영 별로여서 눈 맛이 안 난다. 돈 받은 만큼 일한 사람들과 다리 공덕으로, 불심으로 다리를 놓는 사람들의 차이가 만들어낸 결과다. 기계가 깍은 것과 사람의 손이 깍은 것의 차이다.
그 길로 들어가다 보면 제일 먼저 탑전이 나온다. 1969년 송광사에 조계총림이 개설되면서 방장으로 주석하셨고 엄청난 중창 불사를 통해 오늘날 송광사의 모습을 만든 구산(九山秀蓮 1909∼1983)스님의 다비장(茶毘葬)터에다 1991년에 세운 스님의 사리탑인 적광탑(寂光塔)과 비(碑), 그리고 이를 수호하고 향화를 올릴 탑전인 적광전과 요사채인 무상각(無上閣), 그 문간인 구산선문(九山禪門)이 일곽을 이루고 있다. 그 구산선문은 흔히 보는 절집 대문과는 사뭇 다르다. 언뜻 보기에는 문이라기 보다는 정자에 가까워 보이는 건물이다. 그런데 한 가운데엔 어마어마한 아름드리 나무가 기둥처럼 박혀 있고 그 아름드리 나무의 밑 둥에는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만 구멍이 뚫려있다. 보통의 어른이라면 심하게 몸을 숙이고 어깨를 오므려야 겨우 통과할 수 있을 정도다.
아마 마음을 내려 놓고 겸손한 마음으로 안으로 들라는 무언의 계시인 것 같다. 下心, 下心,... 마음을 낮추고 몸을 낮추고... 낮은 곳으로 임하신 부처님의 뜻을 되새기게 하는 문이다. 이런 문은 여수 향일암에서도 만난다. 해돋이로 유명한 향일암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좁은 바위틈을 지나야 한다. 뚱뚱한 사람은 통과하려면 꽤나 애를 먹을 것 같은 좁은 바위틈의 석문을 통과해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마찬가지 의미일 것이다. 소쇄원의 제월당에서 광풍각으로 내려가는 샛길에도 조그만 문이 서있다. 허리를 굽히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는 그 문 또한 항상 자신을 낮추고 돌아보라는 선비의 마음이 담긴 문이다. 이런 문은 전국 수많은 서원에서도 만날 수 있다.
산사 어디인들 청정지심의 공간이 아닌 곳이 있으랴마는 송광사에서는 다른 절집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영혼의 목욕탕이자 마음의 세탁소인 공간이 있다. 아무도 눈 여겨 보는 이가 없지마는 진정 세심을 위해 절집을 찾는 이라면 꼭 한번 들려 볼만한 공간이다. 바로 세월각과 척주당이 그것이다.
송광사 일주문 계단을 밟고 올라서면 바로 눈앞에 보조국사의 부활의 전설을 간직한 채 뼈대만 서있는 고사목 향나무와 그 뒤편으로 자그마한 두 채의 전각이 나지막한 울타리 속에 갇힌 듯 비켜 서있다. 장난감 같은 집이다. 일주문을 들어선 사람들은 그 쪽은 눈길도 주지 않고 우화각을 들어선다. 그 반대편 홍예교를 이고 있는 우화각과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선 임청당, 침계루와 계곡물이 엮어내는 아름다운 풍경에 넋을 놓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관광 안내 포스터에서 단골로 나오던 풍경의 현장이 바로 거기가 아닌가?
하지만 맞은 편 황홀경에 빠져 눈길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이 곳이야 말로 송광사에만 만날 수 있는 성례의 절차와 부활의 전설이 서려있는 곳이다. 장난감 같은 저 작은 집들은 무엇을 위한 집일까? 저 속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조심스레 문을 열어 보면 더욱더 궁금증만 높아간다. 한 평 넓이도 못될 좁은 공간에는 空, 눈 씻고 찾아보려 해도 아무 것도 없다. 관심을 보이려던 사람들조차도 머쓱해 하며 지나간다. 그러나 건물의 이름표랄 수 있는 편액을 살펴보니 洗月閣과 滌珠堂. 달을 씻는 집. 구슬을 씻는 집이라... 달은 무엇이며 구슬은 또 무엇인가? 이 빈 방에서 달을 씻고 구슬을 씻는다?
한 마디로 조그만 이 두 집은 영혼의 목욕탕이요 마음의 세탁소다. 이 집은 죽은 영가(영혼)가 천도재(죽은 사람의 영혼이 천상에서 나도록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러 절에 들어오기 전 하룻밤 자면서 속세의 욕망과 허물을 벗는 곳이다. 또 부처님을 뵙고자 하는 사람이 청정한 부처님의 성역인 우화각을 지나 사천왕문을 들어서기 전에 이곳에서 더럽혀진 영혼을 씻는 장소인 셈이다.
말하자면 세월각은 여성용이요 척주당은 남성용인데 여성의 세심을 洗月로, 남성의 세심을 滌珠로 이름 지은 옛 스님들의 생각에서 은근하면서도 고아한 멋이 느껴진다. 여성을 달에 비유한 것은 달은 해에 상대되는 음이니 여성을 나타내는 낱말로 선택된 것이 당연하다지만 남성을 해로 표기하지 않고 주, 즉 구슬로 표기한 것은 아마도 月의 의미가 珠인 구슬의 의미와 짝패가 되는 말에서 왔을 성 싶다. 그렇다면 여성들만이 가지고 있는 달이 무엇일까? 그렇다. 달거리. 무엇이 또 있을까? 짓굿은 웃음이 입가에 번진다. 반면 남성은 구슬, 즉 방울로 표현한 것은 스님들 입장에서는 대단한 직설이 아니었을까? 태양에 물들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고 했던가? 해와 달의 은유와 운치를 사실 속에 묻어버리는 현대라면 맹물에 삶아낸 조약돌처럼 그저 ‘여성용’ ‘남성용’ 혹은 ‘남탕’ 혹은 ‘여탕’이라고 이름 붙이지 않았을까?
석가모니불과 일직선상에 있는 목욕탕(?) 배치 또한 절묘하다. 남탕인 척주당은 문을 열면 정면인 반면에 여성용인 세월각은 민망할까봐 그랬던지 옆으로 살짝 돌아 앉았다. 포괄적 악의 근원을 여성들은 조금 더 비관습적인 은유로 남성들은 조금 더 관습적인 은유로 이름 붙인 이 곳이 송광사만의 오염된 영혼들을 스스로 씻는 거룩한 절차를 행하는 장소인 것이다.
서양의 기독교에서는 죄를 씻는 데 물이 이용된다. 이마에 물을 뿌리는 세례 의식을 통해 영혼의 씻김을 받는 것이다. 갠지즈 강에 목욕하던 인도 사람들을 생각하면 힌두교도 마찬가지인 듯 싶다. 불교에서의 영혼의 씻김에는 물이 필요하지 않은 것일까? 혹시 보이지 않는 바람은 아닐까?
세월각과 척주당 앞에 맑은 물을 담은 수구라도 마련하고 일주문을 들어선 탐방객들이 손이라도 씻으면서 잠시나마 깨끗한 영혼을 생각할 수 있게 한다면 절을 찾는 발길이 더욱 경건해 지지 않을까? 지장전 추녀에 걸린 풍경이 운다. 어느 길 잃은 영혼이 조계산 자락을 지나가고 있나 보다.
파일링크 : DSC02807.JPG 출처 : 영혼의 목욕탕, 마음을 씻는 세탁소글쓴이 : 소한재 원글보기메모 :'차 한잔의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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