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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의 차이
    차 한잔의 단상 2006. 7. 5. 17:35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의 차이


    나의 시골집 <소한재>에는 다방이라 부르는 마루방이 하나 있다. 벽에는 어느 스님이 그려준 그림 두 점과 나옹선사와 추사의 다시가 걸려 있다. 그 집에 혼자 있을 때는 혼자서, 래방객이 있을 땐 찾아온 손님과 그 방에 앉아 가끔 차를 마신다. 차 마시는 방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내가 대단한 차인으로 알기 십상이나 사실은 전혀 그렇질 못하다.


    다만 차 한 잔하는 그 분위기를 좋아해 가끔 차를 마신다. 약간 쌀쌀한 새벽, 파아란 새벽 풍경을 보면서 차 한 잔을 마시노라면 가슴으로 전해오는 따뜻함이 좋다. 혼자 어제를 돌아보며, 나를 돌아보며 천천히 차 한 잔을 즐기는 여유가 좋다. 그리고 차 통을 열었을 때 코 끝에 스치는 차향, 그리고 귀때기 그릇에 차를 우려내 따를 때 잠간 코끝을 스치는 차향이 참으로 좋다. 인디언 음악을 들으면서 혼자 차 한 잔을 하고 있노라면 참으로 좋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차 맛이라는 게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하고 괜찮은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하고... 나의 차살이는 언제나 어정쩡하다. 내가 차를 좋아하는 이유는 혼자 마실 때도 좋고 좋은 사람과 둘이 마실 때도 좋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다담과 예의를 연습하는 가족다회도 좋다.


    그러나 차를 마셔온 지가 햇수로는 제법 되건만 아직도 차 맛은 잘 모르겠다. 나는 아직도 차 맛을 잘 모른다. 이걸 왜 마시나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여름날, 몹시도 목이 탈 때, 들이키는 시원한 콜라 한 잔이, 추운 겨울날, 난로 가에 앉아서 마시는 한 잔의 커피가 차 한 잔 보다 더 낫다.


    아름다운 다구를 보면 사고 싶다. 볼 때 마다 사고 싶다. 다구에 대한 욕심은 있어도 차에 대한 욕심은 별로 없다. 사는 집에, 주말 주택인 소한재에 그리고 일터의 내 방에 또 한 벌... 다구만도 몇 벌이 된다. 좋은 차에 욕심을 내야할 텐데 다구에 욕심을 내는 날 보면서 아내는 한심하다는 표정이다. 그것은 아직도 내가 차 맛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차 생활을 즐기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될 터이다. 여름에는 눅눅하고 후덥지근하고 그래서 차 마시기에 별로다. 냉차를 즐기는 이도 많지만 그래도 나는 역시 차는 따뜻해야지 냉차는 별로다. 얼마 전에는 오래 별러 오던 눈부시게 새하얀 백자 다구를 샀다. 보기에도 우선 시원하고 산뜻해 보이기도 하고 차 색깔이 정직하게 드러나니... 그래서 나는 백자 다기가 좋다. 다구에 대한 나의 욕심은 백자 다기에서 멈출 것 같지는 않다. 지난 번에 전주 갔을 때도 들차 통을 몇 번이나 만지작 거리다 왔기 때문이다. 차에 싣고 다니면서 야외에서 차 한 잔 하고 싶을 때를 위해서다. 아마 언제 저질러도 저지르고야 말 것이다.


    초의와 추사 그리고 다산은 차를 통해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맺어왔다. 거의 삼십년 가까운 나이 차이를 뛰어 넘어, 최상류 귀족과 천민 사이의 엄청난 신분의 격차를 뛰어넘어 그들을 이어 주었던 차. 차의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을까? 주변에 보면 늘 차를 사랑하고 차를 즐기는 분들이 있다. 정말 그 분들은 차가 커피 보다 더 맛있고 좋은 것일까? 정말 저 분들은 차에게서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을 느끼는 것인가? 술에 대한 나의 의문의 연장선에 서있다. 그 경지를 나는 열 번 죽었다 깨어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모른다고 차를 즐기는 경지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형편 없는 얼치기 다인이라는 게 차에 관한 책 몇 권을 읽고 차에 대해 전혀 잘 모르는 문외한들에게 차에 대해 아는 척 몇 마디 엮을 수 있을 정도다. 쥐뿔도 차에 대해 아는 것도 별로 없지만 설령 안다고 해도 안다는 것과 느끼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나는 차가 좋다는 것을 아는 정도다. 그러나 세상에는 차가 좋구나 온몸으로 느끼는 분들도 많다. 내공이라고 해야 하나 바둑으로 치면 18급과 9단의 차이라고나 할까? 내가 워낙 하수라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차를 진정으로 즐기는 차도락이라고나 할까 그런 것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즐거움을 못 느끼니 차 마시는 일이 어떤 때는 고역인 순간도 없지 않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식으로 계속 마시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아하 - 차가 이래서 좋구나...” 무슨 파천황의 순간처럼, 그런 개안이 순간이 찾아오는 것일까?


    나야 차가 건강에 좋다고 그러니까... 지난 번 <생노병사의 비밀>에서 우리 몸에 가장 좋은 식품으로 차와 토마토와 레드 와인이라고 했다는데.... 술도 cc로 주량을 계산해 가면서 마시는 음주에 무슨 풍류가 있겠는가? 차를 차 자체로 즐겨야 하는데... 남들이 마신다고 하니까 차가 몸에 좋다니까... 차를 즐기는 척 해보는 것이다.


    초의의 햇 차를 기다리다 못해 보낸 추사의 협박성(?) 편지를 보면 차에 대한 타는 목마름이 느껴진다. “ ..... 수 년 이래 햇 차는 과천의 정자(추사의 집) 위와 한강의 별저(다산의 여유당) 밑에 맨 먼저 이르렀거늘 벌써 곡우가 지나고 단오가 가까이 있네. 두륜산의 한 중(초의선사)이 이에 모습과 그림자는 없어졌는가? 어느 겨를에 햇 차를 천리마의 꼬리에 달아서 다다르게 할 것인가? 유마의 병을 찾아보고 위로한 탓으로 그러한가? 이 병은 무겁지는 않은데 차는 어찌 이다지도 더디더란 말인가? 만약 그대의 게으름 탓이라면 마조의 고함과 덕산의 방망이로 그 버릇을 응징하여 그 근원을 징계할 터이니 깊이깊이 삼가게나. 나는 오월에 거듭 애석하게 여기오. 老果 완당이 원망하노라.”


    어찌 내가 느끼지 못하는 세계가 술과 차 뿐이랴? 누가 내게 차 맛을 가르쳐 다오. 술맛을 가르쳐 다오. 나는 지금 추사의 이 타는 목마름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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